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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영 이사 겸 편집국장
김진영 이사 겸 편집국장

# 다시 해석해 보는 처용가
코로나19가 봄부터 우리의 일상을 유린하고 있다. 창궐하다 한풀 꺾인 기세로 사람들을 느슨하게 하더니 또다시 확산세다. 역병의 전형이다. 울산에는 오래된 역병의 기록이 있다. 바로 처용이다. 서라벌에서 밤을 도와 술을 마신 신라 무역통상대신 처용이 어여쁜 아내가 기다리는 울산 집에 도착하니 사단이 났다. 아내의 방을 범한 역신의 기운이 집안 가득 퍼졌고 역신의 손아귀에 유린당한 아내는 발열과 신음이 낭자했다. 정체 모를 역신의 출현에 처용은 당황했지만 금세 자세를 바로 하고 의관을 정대해 춤사위를 시작했다. 아내를 구할 수 있는 길은 역신을 쫓는 것이라 생각했기에 정성을 다해 춤사위를 펼쳤다. 무녀가 액기를 쫓기 위해 모든 기를 뻗어 하늘과 닿으려고 했던 바로 그 동작이었다.

어쩌면 이역만리에서 들이닥친 정체불명의 잡귀에 대처하는 처용만의 응급처방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춤사위가 끝날 무렵 역신이 아내의 몸에서 떨어져 나왔다. 그리곤 처용 앞에 무릎을 꿇었다. "내가 당신 아내의 아름다움에 반해 역병으로 혼절시켰으나 그대가 나를 벌하지 않고 이렇게 춤사위로 후하게 대하니 이제 그대의 형상만 보이면 어디든 다시 들어가는 일이 없을 것이오" 역신이 남긴 이 말은 신라와 고려,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벽사진경(僻邪進慶: 악귀를 쫓고 경사로운 일을 맞이함)의 주술로 남아 역병 창궐 때마다 응급시스템의 통과의례로 사용됐다. 

고려조 성종이 울산을 찾았다. 동도(지금의 경주)에 들렀다가 태화강과 이수삼산의 비경을 즐기고자 누각에 오른 성종은 신비로운 물고기를 만났다. 바로 고래였다. 아부술수에 능한 신하들이 애써 고래를 잡아 황제께 바치니 성종의 즐거움은 컸으나 금방 화가 닥쳤다. 울산 행차 직후 시름시름 앓던 성종은 얼마 지나지 않아 숨을 거뒀다. 고래의 저주라고 입소문이 분분했으나 조정은 처용 춤사위로 벽사진경의 응급 시스템을 가동했다. 더 이상의 횡액을 막으려는 통과의례였다.
 

처용
처용

조선조 실록에 전하는 기사에 이런 것이 있다. 중종실록 22년(1527), 12월30일 자의 기사다. "밤에 3전(殿) 및 동궁(東宮)이 명정전(明政殿)에서 처용희(處容戱)를 관람했다. 왕자(王子)와 부마(駙馬) 등이 입시하였다" 정조실록 5년, 1월 17일 자 기사는 이렇다. "왕이 하교하기를, 상원일의 전야에 가시(街市)의 아동들이 무리로 대오(隊伍)를 이루어 다투어 제웅을 두드리는 것을 '처용희(處容戱)'라 하는데, 법도에 있는 일은 아니지만 또한 하나의 성대한 풍속이다. 향촌 나례(儺禮)를 행할 때에는 성인도 오히려 경건한 마음가짐을 지녔다. 대개 제석(除夕)의 나례와 원소(元宵)의 용희(俑戱)는 모두 국속(國俗)에 비롯된 것이다"

실록에 전하는 처용의 풍속은 이것만이 아니지만 모두를 열거할 수는 없는 일이다. 조선조 일반인들에게 처용은 어떤 존재였을까. 그 기록을 보자. "정월 보름 전날 밤에 짚 인형을 만드는 데 이를 처용이라 하며 머리 안에 동전을 넣어 둔다. 아이들이 몰려와 밤새도록 문을 두드리며 처용을 부른다. 주인이 문을 열고 던지면 아이들은 회초리질을 하며 끌고 가 머리 안의 동전을 다툰다.

민간에서 맹인 점쟁이를 믿는다. 맹인 점쟁이 말하기를, 일월성과 수성(水星)이 명궁(命宮)에 들면 재액이 일어나니, 이에 해와 달의 모양으로 종이를 오려 나뭇가지에 끼워서 지붕 용마루에 꽂거나, 종이로 밥을 싸서 한밤중에 우물에 던져 나쁜 기운을 물리칠 수 있다고 한다. 가장 꺼리는 것은 처용직성(處容直星)으로, 짚 인형을 만들어 길에 버림으로써 나쁜 기운을 물리칠 수 있다고 한다" 유득공의 경도잡지(京都雜志)에 나오는 구절이다. 이야기를 종합하면 처용은 비교적 가까운 시절까지 왕실과 민간에서 액막이의 유용한 의례로 행해졌다는 이야기다. 신라에서 시작돼 조선조까지 이어진 이 오랜 액막이의 전통이 왜 사라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벽사진경의 풍속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매년 가을이면 울산에서는 지역 대표축제인 처용문화제가 열린다. 올해는 코로나19 때문에 행사 자체가 오리무중이지만 반세기를 넘은 울산의 대표적인 축제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처용문화제는 울산시 남구 황성동 처용암에서 처용고유제를 시작으로 행사가 이어진다. 바로 고유제가 열리는 처용암은 고대사의 비밀을 간직한 곳이다. 처용암과 마주한 개운포는 성곽의 축성법 등 학술적 가치 때문에 지난 1997년 울산시기념물로 지정됐지만 사실은 그보다 신라 때 국제 무역항으로서의 기능이 더 중요한 장소다. 우리 역사에서 서역인이나 아랍인이 등장하는 것은 오래전이지만 일반인들의 생각으로는 처용이나 회회아비 정도를 기억할 뿐이다. 고려 말 개경을 중심으로 유행했던 대중가요 '쌍화점(雙花店)'에는 '회회(回回) 아비'라는 낯선 어휘가 등장한다. 회회아비는 고려 이전부터 이 땅에 산 서역인이나 아랍계열의 사람들을 통칭해서 불렀던 명사였다. 

우리 역사에서 서역인이나 아랍인이 등장하는 것도 바로 개운포에서 시작된 역사다. 국제무역항인 개운포가 신라의 수도 서라벌과 인접해 있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개운포는 우리나라의 가장 오래된 지리지인 '경상도 지리지'와 '세종실록' 등에서도 통일신라 때에 경주를 배후에 둔 산업, 상업의 중심지로서, 신라 최대의 국제무역항으로 나타난다.

여기서 바닷길을 좀 더 살펴보자. 8세기 당시 바닷길, 즉 해양 실크로드의 출발지는 개운포였다. 서라벌의 내항인 반구동 항만시설은 무역항의 내항 역할을 했고 외항인 개운포는 국제무역의 현장이었다. 그 뱃길이 경남 늑도와 전남 영산포라는 한반도의 경유지를 거쳐 중국의 양주와 베트남, 인도로 이어지고 인도양을 거쳐 아랍으로 이어져 이스탄불로 뻗어갔다.

처용암
처용암

당시 서라벌의 국제항만인 개운포는 아랍 상인들이 집단거주지를 이루고 있었고 이는 바다 건너 당나라 양주(揚州)에도 비슷한 아랍촌락과 신라인 거주지가 있었다는 것으로 증명되고 있다.이같은 증거들은 결국 개운포가 신라와 교역하고 왕래하던 중국인들과 일본인들은 물론, 동서 교역의 주역인 아랍인들도 이용하던 국제항이라는 것을 방증하고 있다. 

울산이 과거 서역과 교통하던 국제무역항일 때 과연 어떤 모습이었을까. 천 년 전의 지점에서 천 년의 세월이 더 지나 국제적인 물류시설이 들어서고 자유무역지대가 건설 중인 이 땅의 역사는 낯설지 않다. 우리의 역사는 교류의 역사였고 고여서 정체된 부동의 문화보다 흘러서 교차하고 새롭게 변용하는 흐름의 문화였다.

처용의 원형으로 해석되는 아랍인들은 중국 중심의 동양에 대한 인식을 깨고 서방 사회에 처음으로 신라를 소개했다. 중세 아랍 무슬림 학자들은 자신의 견문이나 연구 및 기타 여행가들로부터의 전문 등을 토대로 신라에 관한 여러 가지 정보를 놀라울 정도로 정확히 기술했다. 그 교류의 과정에서 번번하게 있었던 역병의 창궐이 바로 처용가의 뿌리였다.

어쩌면 다양성의 사회와 이종집단의 뒤섞임 속에서 질병은 물론 사회적 갈등은 빈번했다고 볼 수 있다. 이 부분을 함께 융합하고 어울리게 하는 힘은 관용과  상호존중, 이해와 배려의 문화가 있어야 가능했다. 이 지점에서 처용가는 탄생했고 그 춤사위는 치유의 의례로 행해졌다고 보는 것이 맞다. 바로 그러한 문화적 토양 위에서 국제도시 서라벌과 신라의 위상이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다. 코로나가 창궐하는 시대에 한번쯤 생각해볼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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