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민(安民) 감세개혁(減稅改革) 정책 대동법
안민(安民) 감세개혁(減稅改革) 정책 대동법
  • 김대식
  • 2021.10.13 1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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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칼럼] 김대식 전 울산대 교수

조선은 519년 동안 계속된 나라였다. 중국에선 280년 이상 된 왕조가 드물었고, 철권 통치의 소련도 70년을 넘기지 못했다. 세계 어느 왕조도 길어야 200년이었다. 그러나 조선은 임진왜란, 병자호란이란 큰 전쟁과, 현종시대에 총인구의 10%에 해당하는 100만여 명이 흉년이 들어 기근(飢饉)에 굶주려 사망했던 경신 대기근(1670-1671)을 치르고도 다시 240여 년 가까이 지속됐다. 
 

김대식 전 울산대 교수
김대식 전 울산대 교수

그것은 조선왕조의 국가 통치이념인 민본주의(民本主義)와 민생정치(民生政治)의 핵심인 백성을 하늘로 생각했던 조선의 왕과 관료들이 백성들에게 끼쳤던 덕이 그만큼 컸기 때문이다. 그 중심에 백성들의 기존세금을 약 80% 줄여준 혁명적 조세개혁인 대동법(大同法)이 총체적인 사회 변화를 이끌었다. 이는 집집마다 똑같이 부과했던 진상(進上)을 포함한 공물(貢物)을, 토지를 기준으로 부과해 대지주가 많은 세금을 부담하게 만들었다. 그리해 대동법은 모두가 공평하게 부과된 공물을 공납(貢納)해 민생 안정에 크게 기여하게 됐다. 

조세제도 공물상납제 폐단 개혁
조선 왕조는 토지를 대상으로 부과하는 전세(田稅)인 조(租), 사람의 노동력으로 부과하는 요역(徭役)세인 용(庸)과 고을 특산물인 현물에 부과하는 임토작공(任土作貢)이 원칙인 공물인 조(調)가 국가 재원의 대종을 이뤘다. 

특히 공물(貢物)은 각 고을 단위로 배정하고, 이를 다시 각 민호(民戶) 별로 배정했다. 공물을 집집마다 나누는 일을 향리인 아전이 맡아 공물 분정(分定)의 구체적 규정이 없어 불합리한 점이 많았다. 정부 수입에서 전세보다도 공물이 차지하는 비율이 크게 늘어나면서 균등 과세가 사회적 문제로 등장했다.

백성들은 관아의 아전들이 달라는 대로 바치는 현물공납제 개혁의 필요성을 인식한 율곡 이이가 민생을 위한 체계적 제도개혁 등을 피력한 '만언봉사(萬言封事)'를 선조에게 제시했다. 

이이는 임금이 백성에게 부과하는 세금을 가볍게 하는지, 무겁게 하는지에 따라, 백성은 임금을 임금으로 받들기도 하고 원수로 여기기도 하므로 안민(安民)의 민생정치를 펼 자신의 경세론을 만언봉사에 담았지만, 선조는 외면했다. 

광해군이 백성에게 베풀 시혜대책을 묻는 비망기(備忘記)를 내렸다. 영의정 이원익은 율곡 이이가 선조에게 제언했던 공물변통(貢物變通)으로 백성에게 부과된 공물을 줄이고 쌀이나 포로 대납하는 개혁정책인 경기선혜법을 광해군 즉위년에 시행하게끔 정치적 역량을 발휘했다. 선혜법은 대동법의 예비적 형태라 볼 수 있다. 이원익은 안민의 핵심이 공물을 줄여주는 감세 정책이라고 역설했다.

인조반정 후, 첫 영의정이 된 이원익은 인조의 국정 운영 방안을 민심 안정책인 안민론(安民論)에 두도록 주창하며, 공물을 줄이는 삼도대동법 추진을 제기해 공물변통의 대동법 논의가 시작됐다. 

차별이나 구별이 없는 뜻을 가진 대동(大同)은 공납에서는 공물을 나눠 내는 윤회분정(輪回分定)을 폐지하고, 한꺼번에 공물가를 마련하며, 각 고을마다 불균등한 공물가를 균일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 

이원익이 제안한 삼도(전라도, 충청도, 강원도)대동법은 '이괄의 난'으로 빚어진 사회적 혼란과 긴 세월 동안 방납(防納)으로 이익을 본 세력인 지방 호강층(豪强層)의 저항과 관청의 서리와 같은 공물 수취인의 반격으로 인조 3년에 종결됐다. 

공물의 품질을 빌미로 납입을 거부하고, 방납업자들이 미리 사둔 특산물을 농민에게 비싸게 받아내는 방납의 폐단을 없애고, 이중으로 수취하는 첩징(疊徵)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했던 삼도대동법이 특혜성 이득을 나눠 먹은 기득권의 단합된 부패 카르텔에 의해 중단됐다. 그러나 대동법 폐지 중단을 요청한 강원도 철원 유생들의 상소로 양호(兩湖; 충청도와 전라도)를 제외하고 강원도에서만 대동법이 유지됐다.

고을 특산물 현물대신 쌀·포 납부
조정이 삼도대동법을 폐지하기로 결정을 했지만, 조익이 대동법의 불씨를 되살리고자 철회를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다. 조익은 대동법을 싫어하는 부패한 호강세력과 대동법을 반기는  백성의 소리에 초점을 맞췄다. 

인조가 윤허한 정책을 정면으로 반대한 조익은 대동법이 백성을 구제하고 나라를 일으킬 수 있다는 사명감과 책임감이 있는 당대의 꼿꼿한 지식인 관료였다. 인조는 자신의 결정을 반박한 조익을 조정에서 쫓아내지 않았다. 

조익의 아들인 조복양은 대동법 시행을 위한 근본적 대책 제시가 담긴 상소를 올렸다. 

공물가의 부과 대상이 고을의 민호(民戶)에서 논밭에 물리는 전결(田結)로 바뀌는 조세제도 혁신의 대동법은 백성에게 큰 혜택을 줬다. 

이에 동조한 인조 반정공신인 이시방의 역할로 국가가 백성을 위로할 대동법 논의가 왕실의 수요를 줄이는 공안개정론과 함께 인조시대에 공물변통론의 두 축으로 자리 잡게 됐다. 인조가 혁명적인 조세개혁인 대동법 논의의 출발점을 만든 치적이 정묘, 병자호란 속에 묻힌 것이다. 

효종은 김육이 제청한 충청도에서의 대동법 시행을 윤허했다(효종 2년, 1651). 호서대동법의 성립은 김육이 가려 뽑은 호조판서 이시방을 대동법 추진 과정에서 중추적 역할을 하게 했고, 대동법 지지자인 김홍욱을 충청 감사로 임명해 호서대동법이 안착 되게 만들었다. 

효종이 징소(徵召)한 산림의 좌장인 김집이 김육의 대동법 실시를 반대했지만, 김집은 대동법 시행을 이념적 문제가 아닌 논쟁이 가능한 정책적 문제로 인식했다. 김집의 제자인 송시열이 김육의 사망 이후 이시방의 요청으로 대동법 확대 실시에 노력한 것은 김집의 영향도 있었다. 

삽화. ⓒ왕생이

광해군 시작 숙종 때 전국 정착
호서대동법의 정책 효과가 크게 나타내자, 대동법에 매료된 호남 유생들이 호남지역에 대동법 실시를 요구하는 상소를 연이어 올렸다. 호남대동법은 우여곡절 끝에 확정됐다. 

현종은 충청도와 전라도 전체에 대동법 실시를 윤허했다(현종 7년, 1666). 김육과 이시방 사망 이후 홍명하의 주도하에 송시열의 지원으로 성사된 호서, 호남대동법으로 현종 11, 12년에 흉년과 대기근이 들었을 때, 백성의 신뢰를 얻은 정부가 굶주린 백성들로부터 도전받지 않았던 원인이 됐다. 

경신대기근 직후, 충청도 유생들이 자발적으로 공물가를 결당 10두에서 12두로 상향해주기를 요청했다. 이는 대동법이 조선 사회에 뿌리를 내리고 백성들이 정부를 신뢰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숙종 즉위년(1674)에 경세에 밝은 조현기가 대동법을 전국적으로 확대 실시를 요구하는 상소를 올림으로 대동법은 숙종시대에 마무리됐다. 

백년 동안 펼친 공물변통논의가 일단락되자, 영조는 군역과 관련된 '양역변통(良役變通)'문제를 창경궁 홍화문에서 여론을 조사하는 등, 면밀히 검토한 끝에 균역청을 설치하고 균역법을 실시해 백성의 군포 부담을 반으로 줄여줬다. 

조선왕조가 끈질기게 안 망하고 500여 년 역사를 지탱한 사유는, 백성들을 편안하게 잘 살도록 민생 정책을 핵심으로 하는 안민 감세(減稅)개혁 정책을 추진한 왕과 관료가 건재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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