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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리 대숲
 
이서원
 
검객의 역모인가
처사處士 들의 항거인가
 
태화 십리 죽림에선
달빛이 베어지고
 
강물은 
밤새 삼엄하게
숨소리도 죽였다
 
칼끝이 가늠하는
함성들이 담을 넘자
적폐를 청산하듯
퇴각 없는 공방전
 
댓잎은 사초를 쓰며
마디마디 봉하고 있다
 
△이서원: 부산일보 신춘문예(08), 시집 '달빛을 동이다' '뙤창' '해맑은 원근법', 시선집 '단풍왕조' 등. 이호우시조문학상 신인상 수상. 
 
십리대숲은 울산태화강국가정원의 상징이다. 유유히 흐르는 태화강을 따라 길동무처럼 이어진 십리대숲, 그 길을 따라 걸으면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게 된다. 강물과 바람과 햇빛을 품고 사시사철 변함없는 대숲의 말씀을 들으며 부족했던 어제를 다독이고 새로운 내일을 생각하며 오늘을 다듬는 시간이 되어준다. 
 
 이서원 시조 시인의 '십리 대숲' 시조는 선비의 마음을 담아내고 있다. '태화 십리 죽림에선/ 달빛이 베어지고 /강물은 밤새 삼엄하게/ 숨소리도 죽였다'고, 녹록지 않았던 우리의 역사를 말하고 '댓잎은 사초를 쓰며 마디마디 봉하고 있다'고 읊고 있다. 검객, 역모, 처사(處士),  항거 같은 시어들로 첫 수부터 독자들을 긴장하게 만들며 역사의 장면들을 그려보게 한다. 이렇게 시조 전체가 박동감으로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하게 하다가 '댓잎은 사초를 쓰며 마디마디 봉하고 있다'고 쓴 마지막 행에서는 숱한 사연들을 봉해야 하는 굴곡진 우리의 역사를 보는 것 같아 마음을 서늘하게 한다. 댓잎 사각이는 소리가 백지에 붓이 지나가는 소리로 들리는 듯 하여 가슴이 따뜻하다가도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울림이 있는 절창 한 소절이다.

서금자 시인
서금자 시인

 그렇다. 너와 내가 무사하기 위해 사초를 봉해야 하는 우리의 어제와 또 다르지 않은 오늘, 두 수의 시조 속에 우리의 역사가 봉인되어 있는 듯, 하여 마음의 매무새를 가다듬게 된다. 이렇게 이서원 시인은 지극히 평상적인 일에서 절박한 삶의 현장을 읽어내고 있다.
 
 일찍이 선비들은 사군자인 매화, 난, 국화, 대나무를 글과 그림에 자주 등장시켰다. 그중에서도 사철 푸르고 하늘을 향해 꼿꼿하게 자라면서도 속이 비어있는 대나무를 강직함과 청빈을 근본으로 삶으려는 선비의 표상으로 시조와 동양화의 소재로 즐겨 택했던 것 같다. 조선시대의 한학자 원천석의 '눈 맞아 휘어진 대', 이세보의 '대숲동 의의 녹죽', 윤선도의 '오우가'가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하여 이서원의 십리대숲 시조를 읽으면 선비의 마음이 전해지는 듯 해서 마음이 정갈해진다.
 
 보름달 뜨는 날 태화강길을 걸으며 대숲에 머무는 별과 은하수를 읽고 달빛 베어내는 대숲의 말을 들으며 잠시 선비가 되어보는 건 어떨까? 오늘을 지치게 하는 코로나19시대 마디마디 봉하는 댓잎의 사초에 퇴각도 공방전도 없어져라 염원하며 너와의 오랜 침묵을 깨고 달빛언어로 따뜻한 시 한 수 읊는 유유자적(悠悠自適)한 그런 선비.  서금자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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