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광장] 자유민주주의를 지켜 낸 한국 전쟁
[목요광장] 자유민주주의를 지켜 낸 한국 전쟁
  • 김대식
  • 2022.06.22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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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식 전 울산대 교수
김대식 전 울산대 교수
김대식 전 울산대 교수

윤석열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35번이나 '자유'를 언급해 '자유주의자 윤석열'로 인구에 회자됐다. 대한민국의 정체성은 자유민주주주와 시장 경제체제로, 대한민국의 경제체제는 '자유기업 자본주의 시장경제'로 규정할 수 있다. 문재인 정부가 헌법 4조에 명시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서 '자유'를 빼려다 거센 여론의 반발에 슬그머니 철회한 '자유'를 윤석열 대통령이 반복적으로 외친 것은 자유민주주의 인프라가 경제적으로는 '산업화'이고 정치 사회적으로는 '시민의식의 확립'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자유민주주의의 시작과 끝은 권력자 중심의 집권화(集權化)를 탈피하고 권력 주체가 다원화된 분권화이며 시장 경쟁 시스템이다'(송복 교수).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북한군 7개 사단과 제105 전차여단 등이 소련의 지원하에서 군사 분계선인 38선을 넘어 기습 남침한 한국 전쟁(6·25 전쟁)은 대한민국 핵심가치인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공산주의로부터 지키기 위해 싸운 호국(護國)전쟁이었다. 그것도 한국군이 자유 세계 국가들의 젊은이와 함께 대한민국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싸운 전쟁이었다. 
 일본의 패망이 뚜렷해질 무렵, 소련은 만주를 공격하면서 태평양 전쟁에 본격적으로 개입했다. 소련의 스탈린은 한반도에 소련을 공격하는 전초기지를 방지하기 위해 소련에 우호적인 독립 정부를 세우겠다는 계획 아래 한반도를 집어삼킬 기세로 진격했다. 오키나와에 미군 선발대를 상륙시킨 미국은 소련군의 한반도 남진을 막기 위해 급파할 병력이 없었다. 미국은 한반도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 무장해제를 명분으로 1945년 8월 10일 38선을 중심으로 군사 분할선을 긋자고 소련에 제안해, 38선 이북은 소련군이 38선 이남인 남한은 미군이 진주해 군정(軍政)을 실시했다. 스탈린은 친 소련 정부를 한반도에 수립할 계획으로, 1945년 8월 24일부터 9월 6일에 걸쳐 남북한 간의 교통과 통신을 일방적으로 단절시키면서, 군사 점령 분계선인 38선이 정치 분단선이 되게끔 했다. 소련군 대위 출신인 김일성을 북한 지도자로 낙점한 스탈린은 1946년 2월 8일 북조선인민위원회를 만들어, 무상 몰수 무상 분배의 토지 개혁과, 산업 국유화, 인민군 창설 및 헌법 초안을 작성하는 등 광복된 지 6개월 만에 친소 정부를 세워놓았다. 소련과 김일성은 분단 책임을 미국과 남한에 떠넘기기 위해 남한에 정부가 설 때까지 1년 3개월이나 건국 선포를 미뤘다. 

 남한의 미군정은 전쟁 방지와 평화 유지를 위해 설립된 국제기구인 유엔(UN)에 한국문제를 이양했다. 1947년 유엔은 유엔 감시하에 전 한반도에서 자유 총선거를 실시할 것을 결의하고 유엔 한국 임시위원단을 한국에 파견했지만, 이미 북한에 친소 정부를 세운 소련 군정은 유엔 감시단의 입북을 거절했다. 남한은 유엔 감시하에 좌익세력과 남로당의 방해 공작 속에서도 1948년 5월 10일 198명의 제헌 국회의원을 선출해, 대한민국 헌법을 7월 17일 공포했다. 제헌의회는 대통령에 이승만을 간출(簡出)하고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건국을 선포했다. 남한의 정부 수립을 기다렸던 소련 군정과 김일성은 1948년 9월 9일, 수상에 김일성, 부수상 박헌영 체제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건국을 선포하는 교활한 술책을 부려 한반도 분단이 고착화 됐다.
 분단이 고착화하자 북한의 김일성은 소련의 힘을 빌려 한반도 적화 통일을 목표로 1949년부터 스탈린에게 남침의 승인과 지원을 줄기차게 요청했다. 스탈린은 1950년 초 공산 중국과 군사동맹조약을 체결하고 마오쩌둥의 동의하에 김일성의 남침 지원을 결정했다.
 미국 트루먼 대통령은 미국 단독 참전 보다는 유엔을 통해 한국 전쟁에 개입하기로 결정했다. 미국의 도움과 유엔의 개입으로 탄생한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이 소련의 지원으로 공산주의 북한군에 적화되는 것은, 공산주의와 대결하는 미국의 신뢰도와 유엔의 권위에 심각한 타격을 입힐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오던 북한군은 유엔군과 백선엽 장군이 지켜낸 낙동강 최후 방어선을 뚫지 못하고 교착상태에 빠졌다. 맥아더 장군은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국군과 유엔군이 전세를 일시에 유리한 국면으로 전환시켰다. 마오쩌둥의 중국이 한국전에 개입함으로 한국전은 자유세계와 공산 진영의 대결 양상으로 치닫자, 미국과 소련은 제3차 세계대전으로 비화될 것을 우려해 휴전하기로 합의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한반도 전쟁 재발을 막고 대북한 군사억지력을 확보하려고 한미군사동맹 체결을 미국에 요청했지만, 미국은 한국의 군사 전략적 가치를 낮게 평가해 들어주지 않았다.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이 휴전 협정 진행에 장애가 될 것을 우려한 2만5,000여 명의 반공 포로를 독단으로 석방했다. 결국 미국은 정전협정 체결과 함께 한미군사동맹을 체결하기로 약속했다. 한미군사동맹은 한국의 경제 발전과 정치 민주화에 크게 기여했다.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역사상 처음으로 건설한 자유민주주의 국가, 대한민국의 핵심가치인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지켜준 한국민과 '한국의 자유'를 수호하려고 희생된 자유세계국가의 젊은이들이 있었기 때문에 산업화의 성공으로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했으며 정치적 민주화도 이뤄냈다.   
 윤석열 정부의 핵심이자 기본 철학으로 자리매김한 '자유'는 산업화와 시민의식이란 토대가 성립될 때 전진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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