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명길 수필가

몇 해 전, 친정 마을 뒤 푸서릿길에 대형 트럭이 드나들었다. 공장 건물이 들어서면서 차츰 소공원도 생기고 운동기구가 놓였다. 빈터에 어린이 놀이터까지 만들어졌다. 드디어 일대에 골프장이 들어설 거라는 소문마저 돌았다. 얼마 못 가 평생 흙밖에 모르던 농부조차 거침없이 도장을 찍고 말았다.
 
포도가 주산물인 지역이었다. 한 알 손대면 밭 전체를 변상한다는 엄포가 헛소문만은 아닌지 지나가던 개도 남의 밭에 들어가질 않는다고 했다. 그런 마을에 변화가 밀물로 들었다. 
 
과수원이 사라지면서 카페가 생기고 식당이 늘어났다. 돌미나리를 뜯던 개울은 시멘트로 덮였고, 줍기 싫어지도록 알을 쏟아주던 늙은 은행나무도 간 곳 없어졌다. 
 
대단지 아파트가 들어선다는 말도 뉘 집 개 짖는 소리만이 아니었는지 언제부터 낯선 깃발이 여기저기 꽂혔다. 
 
잠시 잊은 사이에 자드락길을 지키던 암자가 떠났다. 조용한 시골이라 신도가 많진 않았으나 절실한 안식처이던 사람도 있었다. 석가 탄신일이 가까워지면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오방색 연등이 걸렸다. 그러면 한동안 알록달록한 꽃길이 마을까지 이어졌다. 정월 대보름날이나 동짓날이면 등산객이 늘었는데 그날만큼은 생전 시줏돈 한 푼 얹지 않은 사람도 공양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개발의 등쌀에 밀린 암자는 굴삭기가 오르자 금세 서까래까지 뽑혔다. 나는 가끔 근처 친정에 다녔어도 여긴 관심 밖이었다. 든 것은 몰라도 난 것은 안다더니 이토록 산이 밋밋해지고서야 사라진 것에 연연한다.
 
절터에는 문짝 하나 남지 않았다. 지붕을 벗은 채 여기저기 깨진 바닥 가운데로 시멘트 선반이 가로놓였다. 법당이 있던 자리이다. 촛대가 놓인 뒤로 불상이 앉아 있었던 것 같다. 촛농을 거둔 자국이 마른 눈물처럼 허옇게 남아있다.  
 
법당 자리 옆으로 샘 하나가 있다. 공양간이 있던 곳이다. 동그랗고 나지막하게 돌을 쌓아 두어 우물인 줄 알았는데 들여다보니 아래가 계곡이다. 경사가 보이는 계곡물이 콸콸대며 거침없이 흐른다. 쉼 없이 솟는 물이 어미의 젖줄 같다. 이 물로 밥 짓고 공양물도 만들었을 것이라지만 생명이 목을 적셨지 않을까. 
 
지붕 위로 건들거리던 상수리나무가 내려다본다. 머문 듯이 흐르던 구름도 한 줌 햇살에 실려 목을 축인다. 불경이라도 읊는지 물소리가 더 청아하다. 
 
이곳에는 여승 한 분과 늙은 공양주가 계셨다. 언젠가 스님을 뵌 적이 있는데 모습이 어리고 여려 출가한 지 오래이진 않아 보였다. 공양주는 출가한 딸 안부가 그리워 찾아든 어미였을까. 어쩌면 전생에 그런 인연의 고리가 있어 함께하는 것인지 분위기가 사뭇 닮았었다. 당시를 떠올리자 가슴 열고 목 축였을 젖은 눈이 이유 없이 어른거린다.
 
처마 끝에 매달려 몸을 뒤척이던 어린 물고기는 어디로 떠났을까. 어느 바다로 흘러가 유영하는지…. 고개를 돌리는데 터의 구석자리에 목상 하나가 부러진 다리를 접어 좌불처럼 앉았다. 그 옆에 버려진 달력을 주워 넘겨본다. 산사의 사계가 뭉그러진 채 젖어있다. 출입구로 다시 나선다. 주야장천 축문 읽던 산초나무가 해탈했는지 초록 열매를 무성히 매달았다. 이 나무도 며칠 못 가 사라질 것이다. 열매를 따서 주머니에 넣는다. 알싸한 향이 금세 코를 자극한다. 이제 이런 정취마저 물 건너갔다고 생각하니 지켜보는 나무나 사람이나 아쉬움이 마찬가지일 것 같다. 
 
돌담 아래로 작약 한 그루가 피었다. 개발이 이토록 많은 것을 지운다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분홍 등불이 마냥 해맑다. 바람도 머물지 않는 폐사지, 남루한 객이 모든 존재의 실상인 불생불명의 화두에 잡혔다. 생겨나지도 없어지지도 않으며 항상 그대로 변함이 없다는….

저작권자 © 울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