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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정화 소설가
정정화 소설가

핸드폰 사용자라면, 자녀를 가장한 문자나 국가기관을 사칭한 전화를 받아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요즘은 보이스피싱을 주의하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그만큼 핸드폰을 이용한 사기가 우리 삶 깊숙이 들어와 위협하는 게 현실이다.

며칠 전, 도서관 사서에게서 전화가 왔다. "예전에 독서회 회원이셨던 분이 찾아와 선생님 연락처를 알려달라고 해서 전화드렸습니다. 동기일 수도 있다고 하시는데, 성함이 정연수(가명) 씨라네요." 독서회를 하다가 나간 사람은 많았다. 그중에 남자 동기를 떠올려 보니 아무리 해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남자 동기, 여자 동기가 한 명씩 있었지만, 둘 다 연락처를 잘 아는 사이였다. 동기라는 말에 기억의 회로가 멈추는 것 같았다.

"잘 생각이 나지 않네요." "선생님 연락처를 알려드릴까요? 아니면, 그분 연락처를 알려드릴 테니 연락을 하실래요?" "그분 연락처를 주시지요."

연락처를 받아 적으면서 예전에 독서회를 함께하다 미국으로 간 DG 선생이 떠올랐다. 바로 연락을 해볼까 하다가 동기라는 말이 마음에 걸렸다. 아니면 어쩌지, 하는 걱정이 발목을 잡았다. 일전에 남편이 보이스피싱 아니냐며 받은 문자를 공유하기에, 클릭했다가 핸드폰 소액 결제를 못 하도록 막는 전화를 하느라 수고했던 기억이 났다. 전화만 걸어도 돈이 빠져나간다는 두려운 이야기도 들었던 터라 망설여졌다.

예전에 같이 독서회 활동을 했던 친구에게 전화를 해서 DG 선생님 성함이 정연수 씨 맞느냐 하니까, 그렇다면서 네가 회장 할 때 총무 맡지 않았냐고 했다. 다른 건 다 기억이 났다. 이름이 헷갈리고 낯설었다. 친구 얘기를 듣고서야 안도하는 마음으로 전화를 걸었다. 핸드폰을 타고 예전과 똑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반가웠다.

"제가 한국 들어온 지 4개월쯤 되는데 그사이에 시집을 출간해서요. 독서회 회원과 나누고 싶어서 도서관에 찾아가서 수소문했어요. 저랑 동기일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나를 혼란에 빠트렸던 동기라는 말을 DG 선생의 입을 통해 다시 들었다. 나이 차이가 제법 난다고 느끼고 있었는데, 동기라니까 당황스러웠다. 서로 생년을 말하고 보니 짐작대로 큰오빠뻘이었다.

"시집을 내셨다니 축하드려요. 그동안 쭉 작품 활동을 하신 거예요?" "예, 독서회 다닐 때부터 끄적거린 것과 미국에서 한 편씩 쓴 것을 모아 시집을 출간하게 됐어요." "시집 표제는 뭔가요?" "『DG 시집』입니다."

늘 듣던 호여서 무리 없이 시집 제목이 와닿았다. 독서회 다닐 때도 우리가 'DG 선생님'이라고 불러서 이름이 더 생소하게 느껴졌다. 표제가 괜찮다는 말을 전했다. 내막을 들어보니 선생도 내게 연락을 하는데 고전한 듯했다. 선생의 동기들에게 나를 물어봐도 모른다고 했단다. 작년에 내가 바리스타 취미반 교육을 받은 적이 있는데 거기 수강생이 내 책을 받았다고 해서 알아본 결과 이름을 정확히 확인했다고…. 그분은 그야말로 선생의 동기라고 했다. DG 선생이나 나나 서로 이름이 어렴풋했던 것이다. 선생이 나를 찾는 데도 지인과 매체를 이용해야 했으니 피장파장인 셈이다. 미국으로 들어간 지 거의 10년 세월이니 그럴 만도 했다. 많은 것들이 기억 속으로 사라지고 새로운 기억들이 새겨질 만한 시간이었다.

DG 선생은 여름 끝자락에 독서회에 참석해서 인사도 하고, 사인한 시집도 나누었다. 그 모습에서 따뜻함이 느껴졌다. 한때 독서회 회장, 총무로 호흡을 맞췄는데도 이름을 잊어서 일어난 해프닝이었다. 개인 정보가 넘어가면 잃을 게 많은 세상이다 보니 먼저 의심을 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도 선생의 얼굴을 마주하고 보니 의심했던 순간이 미안해진다.

현대 문명이 믿고 만날 수 있는 관계도 단절하는 것 같다. 새삼스레 아날로그 감성이 그리워진다. 친구에게 선생의 이름을 확인해봤다는 말은 하지 못했다. 변하지 않는 부분과 변한 부분. 어투, 눈빛 등은 세월을 비껴간 듯 여전했다. 농담이 늘어 그때보다 한결 여유로워지고 삶의 연륜이 묻어나는 점은 변한 부분이다. 타국에서 아이 넷을 키우면서 삶의 애환이 왜 없었겠냐만 그 시절을 시집으로 담아 귀향한 책벗의 모습을 보니 뿌듯했다.

동기라는 말 때문에 믿지 못하고 별 이상한 사람 다 보겠네 하며 흘려버렸다면, 어쩌면 못 만났을지도 모를 일이다. 법화경에는 '유연천리래상회(有緣千里來相會)'라는 말이 있다. 만날 사람은 만난다고 했던가. 우리는 오랜 독서회 벗을 만나 밥도 먹고 차도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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