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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학골이라는 지명은 왼쪽 날개가 없는 학의 형국이라, 죽은 학과 같다 해 붙여진 이름이다. 사진은 반구대 암각화 방면의 대곡천에서 바라본 사학골.

사학골(死鶴谷)은 언양의 진산(鎭山)인 고헌산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사연댐으로 흘러드는 지류이다. 이물은 연구골을 거처 반곡에서 고하마을 앞 동남쪽 산간계곡을 따라 약 3㎞쯤 굽이굽이 돌아 사연댐의 주류인 대곡천(大谷川)과 합류하는 지점까지의 계곡을 고하골(庫下谷) 또는 사학골(死鶴谷)이라 부른다. 

# 한쪽 날개가 없어 죽은 학의 형국 '사학골'
사학골이라는 지명은 고하마을에서 동남쪽인 반구대로 가는 골짜기 왼쪽(계곡의 북쪽) 산이 풍수지리설로 볼 때, 마치 학(鶴)이 날개를 펼치고 있는 형국을 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산의 왼쪽 날개가 없는 학의 형국이라, 학이 한쪽 날개가 없으니 자유롭게 날지 못해 죽은 학과 같다 해 붙여진 이름이다. 
 
즉, 죽을 사(死), 학 학(鶴), 골짜기 곡(谷)이다. 오늘날 주민들이 흔히 부르는 사낙골, 또는 산악골로 부르기도 한다.

# 1960년대 중반 삶의 터전 이루는 실크로드
사학골은 1960년대 중반 사연댐이 축조되기 이전에는 한실마을 사람들과 반구마을 사람들이 이 골짜기를 따라 언양 5일장을 왕래했는가 하면, 당시 학생들도 반곡, 언양에 있는 학교에 다녀야 했을 정도로 마을 사람들에게는 삶의 터전을 이루는 실크로드(silk road)와 같은 역할을 한 곳이기도 했다. 
 
저녁 해 뉘엿뉘엿/이 마을 적적하네/서러운 것 누구에게 하소연하랴/오랜 길에는 사람 없고/가을바람 수수잎만 흔드네. 
 
 두보의 시(詩) 한 편이다.
 두보의 시처럼 사연댐이 축조된 이후로는 사학골은 좀처럼 사람의 인적이 드문 곳으로 변했다. 곳곳에 도깨비 풀들이 무성하게 자라나 있어 사람의 발길을 끌어당기는가 하면, 집 나온 개들은 마을 길을 누비며 낯선 이방인을 향해 짖어댄다.

 사학골에는 여러 가지 전설이 구전돼 내려오고 있다.

사학골

# 고하마을 아래 화전 일궈 목화 팔며 생활
옛날 고하마을 아래 각단에는 화전을 일구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화전을 일군 양지바른 땅에는 미영(목화)이 잘 자라는 토질로 목화를 따서 시장에 내다 팔기도 하고 목화와 생필품을 물물교환하며 생계를 이어 갔다. 
 
당시 목화는 귀하게 여겨 왔을 뿐만 아니라 주로 면사, 면직물, 등의 방직용과 이불솜, 옷 솜, 탈지면 등의 공업용으로 쓰였으며, 열매는 기름을 짜 식용유, 마가린 등의 제조에 쓰이는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했다. 
 
어느 해 봄, 젊은 각시가 이곳으로 시집을 왔다. 그는 남편을 도와 열심히 일했다. 봄에 목화를 심어 정성 들여 가꾸면 10~11월에 수확해 시장에 내다 팔면 생필품과 바꿀 수도 있을 뿐만 아니라 남편을 위해 따뜻한 솜옷도 만들어 줄 수 있다는 생각에 마냥 기뻐하며 가을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무더운 여름 땡볕에도 아랑곳하지 아니하고 열심히 일한 결과 목화꽃이 탐스럽게 피었다. 얼마 후 열매도 맺었고, 작황이 좋아 풍성하고, 솜털 뭉치가 어른 주먹만큼이나 클 정도로 결실 좋아지자 곧 수확의 시기가 다가오고 있다는 생각에 기쁨에 가득 차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오후 남편이 고하에 볼일이 있어 간 사이에 각시는 목화를 따러 밭에 갔다. 
 
그러나 남편이 볼일을 다 본 뒤 집에 와 보니 색시가 집에 없는 것을 알고 목화를 따러 밭으로 갔을 것으로 생각했다. 밭 어귀에 도착한 남편은 이상한 기분이 감지되었다. 허겁지겁 소리를 지르며 색시를 불러보았으나 밭에서 각시의 행방은 찾을 수가 없었다. 

사학골의 묵은 등의 묵묘(오래된 묘) 추정되는 묘

# 호랑이에게 잡아먹힌 사람들의 뼈 모아둔 묵묘
두리번 거리다 낯익은 소쿠리와 군데군데 핏자국이 있음을 발견했다. 깜짝 놀란 남편은 각시가 필시 산짐승에게 화를 당했구나 생각에 그는 황급히 마을로 가 사람들에게 이러한 사실을 알렸다. 
 
마을 사람들이 서둘러 찾아보니 밭에서 얼마 되지 않은 골짜기에서 흔적을 발견할 수가 있었다. 그 후 각시를 호랑이가 물고간 골짜기를 각시골이라 불렀고, 호랑이가 사람을 잡아 묵(먹)었다. 해서 묵은등 이라 부르며, 지금도 이 묵은 등에 가면 작은 묵모(오래된 묘)가 하나 있는데, 이것이 그때 호랑이에게 잡아먹힌 사람들의 뼈를 모아 묻어 둔 묘라 한다. 

# 어부생계를 책임지던 사학골 깊은 소
 
아주 오랜 옛날에 사학골에는 고기를 잡으며 생계를 이어가는 한 어부가 살고 있었다. 그는 대곡천과 사학골이 만나는 부근에서 낚시도 하고, 그물을 이용해 고기를 잡아 시장에 내다 팔았지만, 근근이 입에 풀칠만 할 정도로 가난했다. 슬하에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자식들이 점점 성장하자, 굶기지 않고 키우려 아버지는 여러 가지로 근심이 많았다. 
 
어느덧 세월은 흘러 자식들은 건장한 청년으로 성장했다. 아버지는 장성한 아들을 데리고 낚시도 하고, 그물을 놓는데 동행하기도 했다. 자식들은 아버지께 보고 배운 솜씨로 손을 보태니 한결 수월했다. 
 
그러던 어느 해 여름. 봄부터 많은 비가 내린 탓으로 개울 물살이 거세어 며칠 동안은 그물을 쳐서 고기 잡기는 어렵게 되었다. 단 하루라도 고기를 잡지 않으면 온 가족이 굶어야 했기 때문에 가족들은 안절부절못했다. 
 
그러자 아버지는 평소 낚시가 잘 되는 장소를 눈여겨 봐둔 사학골(반구산 남쪽 절벽 부근으로 추정)깊은 소(沼)로 낚시를 하러 갔다. 낚싯대를 드리우고 한참을 기다려도 고기 입질은 없었다. 철수해서 당장 집으로 돌아오고 싶지만, 가족의 생계를 생각하니 조금 더 기다려 보기로  했다. 그때 삿갓을 쓴 길 가던 과객(過客)이 “고기가 잘 안 물면 좋은 방법을 내가 알려주겠소!" “아이고~ 어떻게 하면 되겠소?" “제비를 잡아, 불에 구어 그 고기를 낚시 미끼로 사용하면 많은 고기를 잡을 수 있소"
 
다음날 어부는 아침 일찍 잡은 제비를 불에 구어 낚싯대를 들고 지난번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한 곳으로 갔다. 낚싯대를 던지자마자 팔길이만 한 고기들이 연거푸 잡혀 올라오는 것이었다. 수십 년 동안 고기를 잡아 왔지만 이렇게 한꺼번에 많은 고기를 잡기는 평생 처음이었다. 며칠 동안 고기잡이를 하지 않아도 될 만큼 쌀도 사고 어부는 마냥 기뻐했다. 
 

며칠 뒤 어부는 제비를 구워 지난번 그곳으로 낚시하러 갔다. 한나절이 지나고 한참을 기다려도 어부는 돌아오지 않았다. 아들은 아버지가 지난번처럼 고기를 많이 잡아 오시기가 힘이 드시나 보다 하고, 걱정돼 마중을 나갔다. 아버지가 낚시하던 곳을 찾았으나 보이지 않았고 낚싯대만 물 위에 둥둥 떠 있었다. 사방을 돌아다니며 목청껏 소리쳐 아버지를 불러보았으나 발견할 수가 없었다. 
 

그러든 차에 큰아들은 아버지가 낚시하던 물가에서 이상한 흔적을 발견하게 됐다. 마치 빗자루로 돌·자갈들을 쓸어 모아둔 것처럼 물결 모양의 커다란 무늬가 있음을 발견하고 아버지가 필시 어떤 변고(變故)를 당한 것임을 직감했다. 황급히 집으로 달려온 아들은 동네 청년들과 어르신들이 모여 있는 곳을 찾아가 자초지종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이때 나이가 많으신 어르신 한 분이 아버지는 필시 이무기에게 잡아먹혔다는 것이었다. 자기도 오래전에 이무기를 그곳에서 보았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이무기를 잡으려면 다음 보름달이 뜨기 전까지 해치워야 한다는 것이었으며, 이무기를 잡는 방법 등을 세세히 알려주었다. 

이무기가 살았다는 전설이 있는 곳으로 추정되는 사학골 언저리.
이무기가 살았다는 전설이 있는 곳으로 추정되는 사학골 언저리.

# 사람 잡아먹는 이무기 존재 하던 곳
아들은 노인이 알려준 대로 긴 망치와 손에 낄 수 있는 작살(갈퀴) 모양의 팔길이 절반 정도의 쇠로 만든 철 장갑과 쇠사슬 등을 대장간에 가서 만들어 왔고, 이무기를 잡을 준비를 했다. 그런 뒤 며칠에 걸쳐 아버지가 낚시했던 주변을 샅샅이 탐색한 결과 보름달이 뜨기 전에 이무기가 숨어 있는 굴을 발견하게 됐다. 
 
아들은 건장한 동네 청년 서너 명을 모아 물가로 갔다. 청년들에게 물가 모래밭에 튼튼한 말뚝을 박은 뒤 기다리게 하고, 자신이 물속으로 들어가 이무기 아가리에 작살을 꽂아 넣고 나오면 쇠사슬과 이어진 밧줄 수십 미터를 풀었다 당겼다 하라고 당부했다. 만일 자신이 물 위에 떠오르지 않으면 죽은 줄 알고 재빨리 피신하라고 부탁 후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물속으로 들어간 아들은 이무기가 있는 동굴을 찾아냈다. 굴속은 모래와 푹신한 풀들과 낙엽 등으로 보금자리가 만들어져 있었고, 그 위에 짚 동 절반 정도의 거대한 이무기가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이무기는 배가 불러서인지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진희영 산악인
진희영 산악인

아들은 미리 준비한 긴 망치로 자고 있는 이무기 머리를 긴 망치로 툭툭 치며 약을 올렸다. 그러자 순식간에 이무기는 아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 순간 아들은 재빨리 쇠사슬이 달린 작살(갈퀴) 모양의 철장갑을 이무기의 아가리에 꽂아 넣고 굴속을 빠져나와 물가에 있는 청년들과 합세를 했다. 
 
한참을 기다려도 아무런 반응이 없자 아들과 청년들은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해(태양)가 중천을 지날 무렵 이무기는 고통을 견디지 못해서인지 동굴 밖으로 나와 물속에서 괴성을 지르며 쇠사슬이 끊어질 듯 몸부림을 치는 것이었다. 쇠사슬과 연결된 밧줄을 풀었다 당기기를 수십 차례, 힘이 빠진 이무기는 해가 서산에 걸릴때에야 물 위에 떠 올랐다. 아버지를 잡아먹은 이무기가 최후를 맞이하는 순간이었다. 아들과 청년들은 이 이무기를 토막 내 사학골 언저리에 묻었다는 전설이 지금도 전해져 내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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