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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주 수필가·요양보호사
김현주 수필가·요양보호사

다시 오지 않기에 찬란한 오늘. 그 시간 들 속에 산다는 건 맑은 하늘에 떨어지는 빗줄기, 여우비처럼 신기하기도 하고, 폭풍우 몰아치는 두려운 날들도 있다.

사계절이 뚜렷한 나라에 산다는 것, 또한 복이다.

마치 인생의 희노애락처럼 흘러가는 시간의 묘미가 있다. 산줄기의 근육질이 살아 숨쉬는 겨울은 잉태의 계절이다. 척박한 땅을 끌어안고, 품고 견디는 인고의 시간이다. 긴 침묵의 시간이 지나면 조그만 새의 입처럼 연두의 새순이 눈을 뜬다. 영하의 온도를 견디며 온 힘을 다해 봄을 알리는 것이다. 영롱한 봄비를 머금은 매화를 따서 덖어 茶로 마시면 봄을 향기로도 마신다. 천지가 연두로 변하는 계절 오월을 피천득 수필가는 '오월은 금방 찬물로 세수한 스물한 살 청신한 얼굴이다' '내 나이를 세어 무엇하리 나는 오월 속에 있다.' 환하고 맑은 계절을 표현했다.

오월이 지나고 연초록이 짙어지고, 붉은 장미가 타오르는 유월이 왔다. 치자꽃보다 흰, 구름이 흘러가고 개구리 울음소리 들으면 생각나는 박성우 시인의 '유월 소낙비'를 소리 내어 낭독 해 보기도 한다.

'청개구리가 울음주머니에서 청매실을 왁다글왁다글 쏟아 낸다.'

참 재미있게 유월을 읽는다. 

울산도, 신록의 계절을 즐길 곳이 많지만, 올해는 시댁 가족들과 멀리 강원도로 여행을 다녀왔다. 월정사 전나무 숲길을 걷는데 다람쥐들이 쪼르르 달려와 앞을 가로막는다. 손을 내미니 두리번거리다가, 손 위에 아무것도 없자 다시 숲으로 뛰어간다.

땅콩이라도 가져올 걸 모두 한마디씩 했다. 사람을 멀리하지 않고, 여기저기 작은 다람쥐들이 뛰어나왔다. 휴대폰 카메라로 사진 찍으며, 한참을 숲을 바라보았다.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우비를 입고 산책하는데, 저 멀리 쭉쭉 뻗은 나무 사이로 스님들이 포행하는 뒷모습도 보기가 좋았다. 첫날은 캠핑장에 텐트를 치고 잤다. 밤새 내리는 빗소리도 낭만과 운치가 있었다. 텐트 치는 경험이 많지 않은 남편의 서툰 솜씨와 엉켜버린 텐트 줄로 난감해하다가 건너편 아주 큰 텐트, 마치 천막 같은 텐트를 친 실력 있고, 경험이 많은 듯한 젊은 이웃의 도움을 받아 무사히 텐트를 치고 밥을 먹고 누워서 듣는 빗소리는 참으로 좋았다. 끝까지 비를 맞으며 도와준 그분은 평생 잊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고, 사람 냄새 물씬 풍기는 인정도 오래간만에 느꼈다. 그다음 날도 비는 억수같이 쏟아지고 그래도 계획한 산행은 하기로 했다. 강원도는 정말 산과 계곡이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가는 곳마다 산이 멋있고 물이 맑았다.

자연을 즐기며 곰배령 주차장으로 이동하였다. 비는 그칠 줄 모르고 쏟아지고 설상가상 세찬 바람도 불었다. 우비를 단단히 입고 출발하였다. 생각보다 등산객들이 많았다. 일일이 입산 허가증을 발부받고 시작한 우중 산행은 여행의 새로운 묘미를 느끼게 해 주었다. 정상에서는 바람이 너무 세차게 불고 운무가 끼어 정상석 앞에서 사진만 찍고 내려왔다. 그래서 더 오래 기억에 남을 장면들이다. 산행 후 펜션 입실 시간이 너무 빨랐지만 비를 듬뿍 맞은 상태에서는 차에서 지체할 수가 없어서 주인에게 전화로 부탁해서 좀 더 빨리 입실할 수 있었다. 너와 지붕을 이어 지은 집이라 독특한 외관도 좋았고, 내가 좋아하는 옛 물건들로 인테리어를 한 고풍스럽고 멋스러운 펜션은 장작을 넣어 군불로 데운 구들방까지 있어 노곤한 몸을 쉬기에 안성맞춤이였다. 주인 내외는 조용하고 정다운 사람 이였고, 직접 키운 명이나물과 취나물을 건네주는 인정을 베풀었다. 저녁은 고기를 굽는 대신 오리백숙으로 먹고 죽까지 먹으니 든든하고 좋았다. 마지막 일정으로 인제 자작나무 숲으로 향했다. 자연에 듬뿍 취하는 시간이였다. 자연이 좋으니 가는 곳마다 힐링 그 자체였다.

일상으로 돌아오니 여행은 또 다른 에너지를 주고 기분을 한껏 고조시켜 준다.

요양원 어르신들을 대하는 목소리는 맑고 경쾌해진다. 어르신들께 여행 다녀온 이야기를 재미나게 풀어 놓으니 "그래, 그래 잘했다. 한 살이라도 젊을 때 놀러 많이 댕기레이" 하신다. 젊을 때 일만 했다고 후회 아닌 후회를 하신다. 좀 더 건강할 때 좋은 경치 보고 쉼을 하라는 뜻이리라. 치매 어르신들을 돌보는 일은 직업으로 택한 일이라도 해도, 힘든 업무라 할 수 있다. 건강과 심신을 잘 관리해야 한다. 울산에도 마음을 쉬게 하는 곳이 많다. 영남 알프스라 불리는 산들과 태화강 십리대밭, 방어진 송림, 국가 정원, 곳곳에 둘레길 등 헤아릴 수 없이 자연경관이 좋은 곳이 많다. 시간을 내어 자주 산책하며 마음을 정화 시키고, 일상으로 돌아간다면 활기차고 기분 좋게 일할 수 있다. 열심히 일한 만큼 쉬어가는 일도 아주 중요하다.

요양원 어르신들은 나이 들어서는 많은 재산도 필요 없고, 먹고 싶은 것도 없다고 하신다. 다시 젊을 때처럼 건강하면 좋겠다고 하신다. 원도 한도 없이 여기저기 다니고 싶다고 하신다.

더군다나 이렇게 연초록이 짙어가는 유월에 창밖에는 찔레꽃이 피어있고, 야생화들이 환하게 흔들릴 때는 더없이 간절하게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묻어나리라. 

쑥대를 태운 향이 마당 가득 퍼지고 평상에 누워 보는 우주의 커다란 스크린, 하늘 호수에 별을 길어 올리던 그 시절, 우리 어르신들의 고향 집, 오늘 밤에는 꿈길에라도 만나서 행복하기를 바라는 싱그러운 유월이다. 김현주 수필가·요양보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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