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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식 수필가·울산문인협회 회원
이종식 수필가·울산문인협회 회원

내가 머무르고 있는 공간 3층에서 뒤편 구릉지를 내려다보면 경사진 산비탈을 깎아 아기자기하게 만든 밭이 계단을 이루고 있다. 

 그곳에서 막 가을걷이를 서두르고 있는 농부들의 손놀림을 보며 흐르는 세월을 잠깐씩 감상한다. 내가 이곳에 발을 붙인 건 2년 전, 온갖 농작물들이 다복다복하게 푸름을 더해가는 4월 중순쯤이다. 

 산기슭에 자리하고 있지만, 앞쪽은 콘크리트 덩어리들과 한 치의 양보 없이 경적을 울리며 지나는 문명의 이기들로 북적거리는 도회의 모습이요 뒤쪽은 정반대다. 

 그러니까 같은 공간에서도 제자리에 선 채로 뒤로 돌면 농촌이요 다시 뒤로 돌면 도시 안에 내가 있음을 느낀다. 

 도회의 변두리 땅을 푸새 밭으로 일구는 농부들은 대부분 주말을 이용하는 이들이 많다. 나처럼 주중엔 일상의 본업에 전염하다가 자투리 시간을 이용하여 그들은 텃밭을 가꾼다. 그래서 처음으로 하는 이들은 대부분 서툴기 그지없지만, 두서너 해 지내다 보면 농사일도 늘게 된다. 

 배추포기를 묶고 있는 어설픈 농부의 목덜미에 아롱지는 땀방울을 느끼며 저 한 포기를 키우기 위해 쏟아부어야 했던 정성을 고스란히 느낄 수가 있다. 

 겨우내 얼었던 침묵의 땅이 3월이 되면 더운 김이 오르면서 양지바른 곳에서 움이 돋아난다. 때를 같이하여 상추나 양파를 심고 풍상고초의 겨울나기를 무사히 마친 마늘의 비닐을 벗기는 것으로 한 해의 밭농사가 시작된다. 

 '가을의 행복을 위해서는 봄에 씨앗을 뿌려라.'라는 말이 있듯, 농부들은 3, 4월부터는 손발이 빨라져야 한다. 4월이 되면 대파, 시금치 등을 심거나 파종을 한다. 이때쯤 되면 배꽃이나 벚꽃이 지천으로 피어 봄이 왔음을 알려준다. 특히 고개 들어 산을 보면 조팝나무 꽃이 강냉이 튀밥을 뒤집어쓴 듯, 온통 하얗게 눈이 부신다. 나는 이때쯤이면 하릴없이 산을 올려다보며 황홀함에 젖어 든다. 진달래며 철쭉이 쉼 없이 피었다가 지고 이내 유월이 오면 아카시아 꽃잎이 그에 질세라 온 산천에 흐드러지게 피어나기 때문이다. 

 어느 밤늦은 시각 경비 아저씨의 문단속하는 소리에 뒤를 떠밀리다시피 사무실을 벗어나면 풀벌레 울음소리가 자지러지고 나뭇가지에 삐딱하게 걸린 달이 입이 귀에 걸린 듯 웃으며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아득히 먼 하늘에 성긴 별빛이 초롱초롱 이따금 울어주는 부엉이 울음소리에 더 없는 전원의 운치가 배여 난다. 가뭄에 시들어가는 배추처럼 몸은 처지고 피곤하지만, 청량한 공기로 호흡하니 이내 정신이 맑아 온다. 순간 하늘을 올려다보면 무수한 별이 나에게 무엇인가 신호를 보내는 것 같다. 

 비록 상상이지만 활동의 범위는 지구를 벗어나 우주 공간까지 미치고 자연과 동화가 되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음을 느낀다. 모든 것이 내가 즐길 거리라고 생각하니 어둠 속에서 다소 멈칫거리고 망설였던 행동이 이내 자연스러워지고 안온한 분위기에 젖어 든다. 

 하지만 마냥 이러고 있을 수만 없다. 또 다른 내일의 일상을 위하여 이내 발길을 돌려야 한다. 감정이 마르고 인간미가 없는 도회의 틈새로 능숙하게 휘적휘적하며 비집고 들어가야 한다. 마치 몇십 층 높이로 포개진 성냥갑 같은 그런 회색 덩어리 속으로.

 도시의 생활은 때로는 만원 버스를 탄 것보다 더 역겨울 때가 있다. 

 한 치의 여유 공간도 허용 없이 줄지어 붙은 건물, 꽉 막히는 도로, 경쟁에 이기기 위한 몸부림과 시기, 보이지 않는 추격자들의 함성이 범벅되어 아지랑이처럼 피어나기 때문이다. 언제나 오랏줄 같은 넥타이로 조여진 목을 더 죄며 허용될 수 없는 실수라도 발생할까 봐 항상 긴장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 생활을 등진 전원생활이라고 마냥 행복할 수만은 없다. 나름의 고초가 있겠지만, 밭농사 논농사를 위하여 흘러가는 물을 막지 않듯 이웃을 배려하는 마음에서 우선 여유로움과 넉넉함을 느낀다. 

 농기구나 영농 자제를 나누어 사용하는 것은 기본이다. 모종이나 씨앗이 남으면 이웃에 나누어 준다. 알뜰하게 거둬들인 푸성귀도 듬뿍듬뿍 나누기도 예사다. 싱싱함이 그득하고 따뜻함이 넘쳐나는 전원생활의 여유로움이다. 

 산나리꽃이 아름답게 피어나는 유월이 오면 산천은 온통 녹음으로 뒤덮인다. 이때쯤이면 농부들의 일손은 더욱 바빠진다. 따뜻한 기온에 비가 자주 내리니 풀이 잘 자라기 때문이다. 비가 내린 뒤 일주일만 김을 매주지 않으면 농작물이 자랄 수가 없는 지경이니 이 시기에 김을 자주 매고 이랑의 북을 돋아 줘야 대가 튼실하고 뿌리가 알차게 여문다. '부지런한 사람은 주인 발걸음 소리 듣고 농작물이 자란다.'라고 하는 말이 그래서 생긴 것 같다. 대부분의 농작물은 이 시기에 다 자란다. 그래서 지지대가 필요한 작물은 이때 세워서 견고하게 고정을 해야 세찬 비바람에도 잘 견딜 수가 있다. 

 밭 주인의 성격이나 생활방식을 이때 엿볼 수가 있다. 건성건성 하는 것보다 정성스레 가꾸어 놓은 것을 보면 탐스럽다. 그 모습에서 얼굴 모를 주인의 성품을 짐작해 보기도 한다. 농작물은 우리의 건강과 가장 연관이 깊지만, 가장 불신을 받는 것이 시중의 농작물이다. 

 그래서 자경 농작물의 섭취인구가 증가하고 도시 주변의 텃밭 가꾸기는 날로 인기를 더해가고 있다. 유기농 풋고추가 제법 어른 손가락만큼 굵어지는 칠월과 함께 하루가 다르게 내리뻗는 고추의 힘줄기를 보면 군침이 돈다. 싱싱한 푸른 고추에 고추장을 듬뿍 찍으면 그 선명한 청홍의 조화에 내 마음은 더없이 싱그러워진다. 팔월은 무더위에 지친 사람이나 작물들도 쉬어가는 계절이다. 바짝바짝 타들어가는 가뭄에 모질게라도 견뎌낸 작물들만이 결실의 기쁨을 맛볼 수가 있다. 그래서 시월은 결실이 더욱 값진 것이다. 

 지금껏 애써 가꿔온 것을 변덕스러운 기상조건으로부터 잘 지켜야 온전한 결실의 기쁨을 맛볼 수가 있다.

 촘촘하게 자라던 농작물들이 추수가 시작되면서 산천에 지는 낙엽과 함께 헤싱헤싱한 모습으로 변해간다. 그 상태로 융동설한이 지나가고 꽃피는 봄날이 올 때까지 휴한기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것은 끝이 아닌 또 다른 시작을 위한 준비의 기간이다. 끝없이 반복되는 시절과 그 속에서 발생하는 생성화육의 긴 여운을 빈 곳에서 막연히 느낀다. 이종식 수필가·울산문인협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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