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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울주군 웅촌면 검단리유적지 전체 발굴현장을 담은 유일한 사진. 부산대학교박물관 제공
1990년 울주군 웅촌면 검단리유적지 전체 발굴현장을 담은 유일한 사진. 부산대학교박물관 제공

1990년 국내 최초로 울주군 웅촌면 검단리에서 청동기 후기인 기원전 7~8세기 주거지를 보호하기 위한 큰 도랑과 집단 마을터 등 선사시대 문화재가 발견됐다. 

1989년 골프장 확장 공사 중 1만 3000㎡ 유적지 드러나
34년 전 1989년 5월 울산컨트리클럽의 골프장 9홀 확장 공사 과정에서 드러난 1만 3,000㎡(약 4,000평)의 유적 현장에서 부산대학교 박물관(김종원 관장)은 지표조사를 마치고 다음 해 2월부터 4월까지 약 3개월간 검단리 유적지(사적 332호)에서 시굴조사를 벌였다. 김종원 관장이 조사단장으로 직접 참여해 고고학, 고고미술사학, 지질학 등 학계 관계자와 국내 주요 박물관 학예연구사들을 모아 꾸린 발굴팀은 유구 조사에만 집착한 국내 청동기 발굴조사의 틀을 깨고 길이 약 300m 환호(環濠)와 주거지 등 약 6,000㎡ 가까운 청동기 유적지를 밝혀내는 성과를 이뤘다. 

1990년 울산컨트리CC의 골프장 확장공사 현장에서 발굴된 청동기 네모난 집자리와 배수로 등 일명 '울산식 집자리' 발굴이 한창인 검단리 유적지. 부산대학교박물관 제공
1990년 울산컨트리CC의 골프장 확장공사 현장에서 발굴된 청동기 네모난 집자리와 배수로 등 일명 '울산식 집자리' 발굴이 한창인 검단리 유적지. 부산대학교박물관 제공

발굴 경비는 1988년 18홀 규모로 오픈한 울산컨트리클럽의 소유·운영체인 사단법인 울산개발의 이사장 등 임직원들이 부담했다고 김 관장은 밝히면서 발굴조사를 끝낸 유적지를 흙으로 다시 덮기 전에 유적지의 마지막 모습을 항공사진으로 찍지 못하고 포크레인을 타고 올라 겨우 전경 사진 1장만 기록한 것을 두고두고 후회했다는 소회를 1995년 발표한 '울산 검단리마을 유적' 발굴보고서에서 남겼다.

한장의 사진으로 남은 부산대학교박물관의 검단리 유적 발굴팀. 부산대학교박물관 제공
한장의 사진으로 남은 부산대학교박물관의 검단리 유적 발굴팀. 부산대학교박물관 제공

부산대박물관팀 3개월간 6000㎡ 규모 집단주거지 등 발굴
골프장 증설터 일부인 발굴조사 현장에서 드러난 곳은 주거지 92동과 고인돌(지석묘)과 돌널무덤(석관묘) 등 3기 그리고 어망추 등 토기 560여 점, 석검 8점 등 석기 230여 점 등 다량의 유적과 유물이 나왔다. 

김 관장은 더 넓은 지역에 청동기 유적지가 분포했을 것으로 추정했다. 유적지 위치는 정족산 아래 동쪽 검단들녁으로 회야강과 곡천천이 삼각형태로 휘어 감으며 사방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해발 100m가 넘는 나지막한 구릉 정상부다. 이후 유적지에서 원형에 가까운 환호 전체와 드러난 집터들은 '울산식 집자리', 토기들은 '검단리식 토기'라 불리며 울산을 대표하는 청동기 문화로 떠오르게 된다. 

방어 시설로 추정되는 환호에 둘러싸인 청동기 시대의 집단 주거시설의 상상도. 울주군 제공
방어 시설로 추정되는 환호에 둘러싸인 청동기 시대의 집단 주거시설의 상상도. 울주군 제공

울산식 집자리는 원형꼴보다 배수시설을 갖춘 네모꼴(방형계) 집자리가 많이 나와 일컬어졌다. 집 밖으로 빗물 유입 차단과 생활 오수를 빼냈을 듯한 배수구가 바깥쪽에 사각틀형으로 만들어진 것이 큰 특징이다. 배수구는 대부분 아무런 시설 없이 도랑을 판 형태이지만, 일부 바닥에서 평평한 돌을 깐 흔적도 나왔다. 

집자리 내부에서는 땅을 파서 구덩이를 만들고 돌을 내화벽 삼아 음식을 만들 수 있는 화덕터 형태도 나왔는데 이런 배수구를 갖춘 네모꼴 집자리는 부산과 경주에서도 나왔지만 울산의 청동기 유적지에서 더 많이 발굴됐다. 

무늬가 없고 토기 입구에 짧은 빗금무늬가 있는 '검단리식 토기'. 한반도 동남해안지역에서만 출토된 청동기 유물로 울산 검단리에서 다량으로 처음 발견돼 검단리식 토기라 이름 지어졌다. 대곡박물관 제공
무늬가 없고 토기 입구에 짧은 빗금무늬가 있는 '검단리식 토기'. 한반도 동남해안지역에서만 출토된 청동기 유물로 울산 검단리에서 다량으로 처음 발견돼 검단리식 토기라 이름 지어졌다. 대곡박물관 제공

검단리식 토기는 속이 깊은 바리모양(鉢形)의 무늬가 없는 민무늬토기(무문토기·無文土器)이며 아가리 부분에 낟알문 등이 새겨진 것이 특징이다. 경주·양산에서도 유사형태 토기가 출토됐지만 울산 방기리, 교동리, 연암동 등 울산지역에서 집중 분포돼 출토됐다. 이 토기는 검단리 유적지에서 처음 발견돼 '검단리식 토기'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울산과 경주·포항 등 동남해안지역 외에는 발견되지 않아 지역성이 매우 강한 유물이다. 

1990년 울산컨트리CC의 골프장 확장공사 현장에서 발굴된 청동기 네모난 집자리와 배수로 등 일명 '울산식 집자리' 발굴이 한창인 검단리 유적지. 부산대학교박물관 제공
1990년 울산컨트리CC의 골프장 확장공사 현장에서 발굴된 청동기 네모난 집자리와 배수로 등 일명 '울산식 집자리' 발굴이 한창인 검단리 유적지. 부산대학교박물관 제공

이중 환호·제사 기능 등 발전 다양…마을 교류 활발해지며 소멸
환호는 대략 총길이 300m, 폭 2m, 깊이 1.5m 규모이며 사람이 뛰어넘을 수 있는 정도지만, 본 모습은 훨씬 더 넓고 깊었을 것으로 짐작한다. 환호 도랑을 따라서 안쪽에는 목책을 세운 구덩이들이 잇달아 있고 주변을 경계하기 위한 망루 기둥을 세운 것으로 추정되는 구덩이도 남·북쪽 2곳에서 발굴돼 주거지로 들어서는 입구터를 가늠케 했다. 

환호는 물에 잠긴 구덩이로 마을의 안과 밖을 구분 짓고 야생동물이나 적 등 외부세력의 공격을 막기 위한 방어시설 추정하는데 우리나라에서 온전한 환호가 주거지와 함께 발견된 곳이 울주군 검단리 환호가 처음이다. 

이후 춘천 중도, 진주 대평, 화성 쌍송리, 김포 양촌리, 화성 동학산 등 한반도 전역에서 이러한 방어형 집단 주거시설인 청동기 유적을 발견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이들 가운데 도랑이 더 깊고 넓은 환호, 이중 환호가 발굴됐고 주거 터전이 아닌 성스러운 존재를 모신 제사 유적도 발견돼 환호 시설은 계속 발달하고 쓰임새도 넓어진 사실도 밝혀졌다. 언제나 첨단시설은 진화·확장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마을터의 총면적은 대략 4,000㎡로 집자리는 환호가 만들어지기 이전과 이후 그리고 환호가 소멸된 때 등 형성 시기에 따라 3단계로 구분하고 있다. 검단리 유적지는 지리적으로 큰 하전이 인접한 구릉지로 논농사보다는 수렵, 어로, 채집 중심의 후기 청동기 문화로 짐작되는 유물들이 많이 나왔다. 집단으로 사냥과 고기잡이가 왕성했던 첫 시기의 26동 첫 단계 집자리는 환호 없이 늘어가다 점차 위험 요소들이 생겼다. 생산량이 늘어가던 두 번째 단계의 17동 집자리는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 집자리마저 불태워 가며 환호를 만들었고 집자리 수도 조금 줄었다. 마을간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주변의 긴장 관계가 느슨해지고 물이 가득한 도랑은 거추장스러워졌다. 환호가 사라진 마지막 단계 집자리는 가장 많이 발굴돼 37동에 이른다.

언론에 처음 공개된 1990년 검단리 유적지에서 발굴한 고인돌(지석묘)의 사진. 부산대학교박물관 제공
언론에 처음 공개된 1990년 검단리 유적지에서 발굴한 고인돌(지석묘)의 사진. 부산대학교박물관 제공

울산 청동기 유적 200여곳 중 절반 가까이 울주군서 나와
울산의 청동기 유적은 모두 200여 곳 가까이 이르지만 반수에 해당하는 약 100여 곳이 울주군에서 발견됐다. 그중 울주군 웅촌면 검단리 유적이 가장 주목 받는 이유는 청동기의 환호와 집단 주거지를 함께 발굴한 국내 최초 유적지로 청동기 발굴조사에 새 지평을 열었기 때문이다. 또 한민족의 원류가 된 원시 북방계 민족이 한반도로 남하해 정작하면서 일본 야요이문화에 영향을 끼친 관계를 뒷받침할 만한 사료로 부각되며 한중일 3국 고고학계의 큰 관심을 끌고 있다. 

이외에도 2003년 울산 북구 산업로 배면도로 공사 중 발굴된 연암동 환호 유적은 우리나라에서 최대 규모의 환호로 밝혀지면서 선사 유적의 큰 획을 그었다. 

국내서 알려진 선사시대 문화재 가운데 최초이자 가장 오래된 문화재 반구대암각화를 품은 역사 도시가 바로 울산이다. 반구대 암각화는 문자가 없던 시기 세밀하면서도 촘촘하게 300여 점이 넘는 많은 그림을 바위 한면에 새긴 암각화 사례는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집약적 기록 유물이다. 또한 고래잡이 모습을 표현한 가장 오래된 그림이기도 하다. 선사시대를 상상할 수 있는 독보적인 유물이 어디 이뿐인가 돌벽 상단부에 기하학적 수수께끼 같은 문양들을 새겨 넣은 천전리각석도 나란히 국보로 등재돼 울산의 자긍심을 드높이는 선사유적이다.

1990년 국내 최초로 청동기 마을 주거지와 환호(도랑)유적이 온전한 모습으로 함께 발굴된 울주군 웅촌면 검단리유적지의 현재 모습. 김동균기자 justgo999@ulsanpress.net
1990년 국내 최초로 청동기 마을 주거지와 환호(도랑)유적이 온전한 모습으로 함께 발굴된 울주군 웅촌면 검단리유적지의 현재 모습. 김동균기자 justgo999@ulsanpress.net

박물관 없던 시절 출토 유물들 뿔뿔이 흩어져 아쉬움
기대를 갖고 몇 차례 찾은 검단리 유적지는 아쉬움이 많았다. 선사시대 유적지가 대부분 그러하듯 텅 빈 땅에 문화재 출토 내역을 적은 입간판만 외로이 황량한 들판을 지키고 있다. 고연공단과 논길을 지나 눈에 띄지도 않는 유적지를 찾은 노력이 허무해지며 설렘은 한순간 거품이 돼 버렸다. 발굴조사를 마친 선사 유적지는 아파트와 도로가 들어섰고 골프장이 돼버렸다. 박물관이 없던 시절 울산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타 시·도 박물관으로 뿔뿔이 흩어져 이산가족 신세다. 문득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란 말이 생각난다.

울산 선사시대 유적과 유물의 모형이라도 한자리에 모을수 있다면 어떨까 상상해본다. 돌촉으로 사냥 흉내를 내고 돌어구로 물고기를 낚는 시늉도 하면서 보고 느끼며 체험할 수 있는 복합 선사문화공간이 조성된다면 또다른 랜드마크가 되지 않을까? 장롱 속에 감춰진 보석보다 손가락의 보석이 더 빛나듯 울산의 찬란한 선사유적을 실감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고대해 본다. 끝으로 취재에 도움을 준 울주군 유수미 학예연구사님과 부산대박물관 조성호 조교님에게 지면을 빌려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김동균기자 justgo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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