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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룡산에서 바라본 울산시가지. 멀리 운무 속에 문수산이 자리하고 있다.
무룡산에서 바라본 울산시가지. 멀리 운무 속에 문수산이 자리하고 있다.

영남알프스의 변방에 위치해 있는 무룡산은 삼태지맥의 한 봉우리다. 토함산(765m)의 산줄기가 이 구간의 최고봉인 경주 외동의 삼태봉(630.5m)을 거처 방어진 화암추등대까지 이어지는 도상거리 40.5㎞로 그 중간 기점에 무룡산이 있다. 무룡산은 울산의 진산(鎭山)이다. 옛날에는 진산(鎭山)과 주산(主山)의 제도가 있었는데 무룡산은 울산을 지켜온 수호산으로 고을 사람들은 이 산을 우러러보며 가뭄이 들면 이곳에서 비를 빌었던 성산(聖山)이기도 하다. 또한 무룡산은 울산아리랑의 노랫말에도 실릴 만큼 우리와 친숙해져 있는 산이다. 그리 높지도 않으며 산마루에 올라서면 동해바다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을 만큼 일망무제를 이루는 어머니의 품속과도 같은 산이다. 무룡산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무룡산 정상석.
무룡산 정상석.

선녀들의 놀이터였던 산 정상 연못

옛날 무룡산 꼭대기에는 천지(天池·하늘의 호수)라 불릴 만큼 큰 연못이 있었다고 한다. 봄철이면 아름다운 꽃들이 만발하고 연못 주변에는 이름 모를 산새들과 물 위를 유유히 떠다니며 온갖 교태를 부리며 노니는 물새들과 노루, 사슴 등이 한가롭게 노닐었다. 오색 무지개가 수시로 드리우고 물안개가 자욱이 피어오르는 신천지 같은 곳이었다. 

 이곳에는 일곱 마리 용들이 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여름날 하늘나라 일곱 선녀가 이곳에 물놀이를 즐기려 내려와 용을 타고 놀았다. 일곱 마리 용 가운데 앞을 못 보는 용 한 마리가 있었는데, 이 용을 탄 선녀는 이들과 어울려 즐겁게 놀 수가 없었다. 

 다른 선녀들이 용과 어울려 즐겁게 노는 탓에 해는 서산으로 기울고 하늘나라로 올라갈 시간을 어기고 말았다. 옥황상제는 사자(使者)를 시켜 선녀들을 당장 하늘나라로 데려오라는 불호령을 내렸다. 여섯 선녀들은 용들과 함께 하늘로 올라갔으나 앞을 못 보는 용 한 마리는 오를 수가 없었다. 

 한편 옥황상제는 아직도 선녀 한 명이 용을 타고 놀고 있는 것을 내려다보며, 재차 사자를 시켜 그 선녀를 데려오라는 명령을 내렸다. 구름을 타고 내려온 사자는 옥황상제의 진노가 있으니 당장 하늘나라로 가자고 하였으나 사자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며 "옥황상제님은 전지전능 하시니 내가 타고 있는 용의 눈을 뜨게 해주시면 올라 가겠다"고 잘 여쭈어 주실 것을 당부했다. 

 이 말을 전해 들은 옥황상제는 마음씨 착한 선녀임을 알고 하늘나라로 승천 시켰다. 눈먼 용은 하늘로 올라가서 옥황상제의 조화로서 눈을 뜨게 되었고 그 후 마음씨 착한 선녀와 배필이 되었다. 

 세월이 흘러 어느 하루는 무룡산 산정에 천둥과 번개가 며칠을 요란스럽게 퍼붓더니 있었던 연못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고 주변은 대명지(大明地)가 되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뒷받침이라도 하듯이 일반적으로 산에는 산 정상(꼭대기)이 있으나 무룡산은 산 정상이라 할 수 없을 정도로 정상 부근은 학교 운동장처럼 펑퍼짐하다. 

매봉재에서 바라본 무룡산.
매봉재에서 바라본 무룡산.

울산을 지켜온 수호산

운무를 품에 안고 사랑 찾는 무룡산아 / 산딸기 머루 다래 따다 주던 그 손길 / 앵두 같은 내 입술에 그 이름 새겨 놓고 / 꿈을 찾아 떠난 사람아 (이하중략)

 울산사람들이 친숙하게 부르는 울산아리랑의 한 대목이다. 

 무룡산 정상 서쪽의 연암(蓮岩), 동쪽의 정자의 중간에 가운데 고개를 신라 임금이 지나갔다 해서 왕거령(王去嶺)이라고도 부르기도 한다. 

 가운데 고개 서쪽 바로 아래 무룡산 기슭 절골에는 지금도 청기와 조각이 발견되기도 하는데, 빈대 때문에 없어졌다는 신라시대 절인 오봉사(옥천암)가 있었다. 절골 아래 여러 산골짜기는 봄이면 온갖 산나물이 지천에 널부러져 나물 캐는 아낙네들이 골짜기를 누비었고, 물이 맑아 여름이면 멱 감는 아이, 민물장어, 참게, 가재를 잡아 모닥불에 구워 먹기도 했다. 가을이면 다래, 머루를 따먹고, 겨울철에는 땔감을 장만하여 울산장에 내다 팔기도 했던 일터이기도 했다.

 

가뭄이면 기우제 올렸던 성산

당시 농사를 주업으로 했던 이곳 주민들의 이야기에 의하면 무룡산 정상에 묘를 들이면 울산에 비가 오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울산에 비가 내리지 않는 날이 지속되어 오래 가물면 동서남북 사방 네 개 마을 사람들이 무룡산에 올라가 누가 몰래 묘를 만들지나 않았나 하고 샅샅이 뒤지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상한 건 날이 몹시 가물 때 올라가서 찾아보면 반드시 누가 몰래 묘를 만들어 놓았는데, 가끔 묘를 발견못하게 봉분을 만들지 않고 평장으로 들이기도 하였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이 시신을 찾아 멀리 버리고나면 반드시 며칠 있다가 비가 내리곤 하였다고 한다.

무룡산 정상부에 위치한 스캐터통신 안테나.
무룡산 정상부에 위치한 스캐터통신 안테나.

우리나라 최초 통신시설이 설치된 곳

무룡산 정상 조금 못 미치는 곳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국제통화시설인 무룡산 중계소가 자리 잡고 있다. 근대적인 국제통화방식인 지름 19m의 스캐터(전파를 바다를 향해 발사하는 방식) 통신용 안테나가 설치된 곳이다. 정부는 1968년 6월 일본 하마다(濱田)와 가장 가까운(270㎞) 무룡산에 중계소를 설치했다. 1980년 11월 한일 해저케이블이 개통돼 국제통화가 이원화될 때까지 이곳은 당시 우리나라 유일한 통신 시설이 설치된 곳이었다. 

진희영 산악인·기행작가
진희영 산악인·기행작가

 1991년 3월 해저 광케이블을 통한 국제통화가 일반화되면서 운영이 중단됐고, 같은 해 11월 한국통신 사적 제5호로 지정되었으며, 2000년 12월 시민들에게 무료 개방됐다. 

 당시 국민들이 일본에서 열린 김일 선수가 일본 안토니오 이노키 선수를 박치기로 멋지게 쓰러트리며 우승하는 프로레슬링 경기를 볼 수 있었던 것도 스캐터 통신의 덕분이었다고 한다. 진희영 산악인·기행작가

*이글은 필자가 40여년 전 울산 북구 달천(달내) 쇠부리의 마지막 불매 꾼이었던 고(故) 최재만 옹으로부터 들었던 이야기를 바탕으로 작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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