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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열린 울산대공원의 장미축제에서 만개한 65종 300만 송이 장미꽃을 선보였다. 울산신문 자료사진
지난 5월 열린 울산대공원의 장미축제에서 만개한 65종 300만 송이 장미꽃을 선보였다. 울산신문 자료사진

남부순환도로를 달려 남문 주차장에 도착했다. 휴대폰에 저장된 울산대공원 가이드 맵을 펼친다. 부지 면적이 110만 5,000여 평(약 370만㎡). 서울의 대표공원인 올림픽공원(144만 7,122㎡)보다 2.5배 큰, 우리나라 최대의 근린공원이다. 어디까지 발자국을 찍어야 최고의 산책이 될까. 우기로 변한 듯 비의 날이 지속되더니, 지금은 대서(大暑)를 코앞에 둔 뙤약볕이 대기를 점하고 있다. 오늘은 리넨 원피스에 챙 넓은 모자를 썼으니 명랑소녀가 돼야지. 선글라스는 자연의 색을 어둡게 만드니 절대 안 써야지. 해를 가리고 땀을 식힐 부채와 생수도 챙기고. 손풍기는 어디에 뒀더라. 차 문을 열자 더운 기운이 훅 끼친다. 음악회를 하는지 신나는 노래가 내달려온다. 공원 입구에서 잠시 고민이다. 자전거를 빌려 탈까, 힘들어도 걷기운동을 할까. 아차, 원피스를 입었네! 아쉽지만 자전거 산책은 무리다. 키다리 조화들이 서 있는 '사계절꽃밭'을 지나 낮은 경사로를 오른다. 'SK광장'이다. 꽤나 넓어서 무대가 멀다. 세 남성의 관악연주가 바람선율을 싣고 나부낀다. 곧 등 뒤에서 아이들 함성이 걸음을 부른다. 기저귀를 찬 꼬마가 부모 손을 마다하곤 '키즈테마파크' 쪽으로 뒤뚱뒤뚱 걸어간다. 나는 함께 들어갈 아이가 없어서 자전거만큼 아쉽다. '환경테마놀이시설'에 설치된 원통미끄럼틀, 뜀동산, 무지개그물 야외놀이터는 북새통이다. 아이들은 놀이기구 색깔만큼 신나건만, 부모들은 눈을 떼지 못하면서도 지쳐 보인다. 예전의 나도 저랬으려니. 

울산대공원 남문 광장의 전경. 울산시 제공
울산대공원 남문 광장의 전경. 울산시 제공

한일월드컵 앞두고 개장…어느새 21살 된 우리나라 최대의 도심근린공원
나무숲에 반쯤 가려진 '곤충생태관'과 '생태여행관' 나들이는 다음을 기약한다. 남문 쪽의 '파크골프장'과 '윗갈티연못', '소풍마당'과 '미로원'과 '자원식물원', '벽천분수'와 '야생동물구조센터'와 '동물원', '암석원'과 '야생초화원'과 '유실수원', 그리고 지난달의 장미축제 장소인 '장미원'도. 종일을 걸어도 다 돌아보지 못할 터다. 발길 닿을 곳이 첩첩산중이니 어쩌랴. '청소년광장'과 '숲속오솔길' 이정표 앞에서 망설인다. 산책객이 많은 넓은 길, 숲 이야기가 들려오는 좁은 길. 어디로 걸음을 뗄까.  

 

노란 숲에 두 갈래 길이 나 있었지요/ 나는 두 길을 함께 갈 수 없음을 안타까워하며/ 한쪽 길이 풀숲으로 꺾여 내려가는 곳까지 한참을 서서/ 바라볼 수 있는 만큼 멀리 바라보았지요// 그런 후 그만큼 어여쁜 다른 길로 갔지요/ 아마 더 나아 보였겠지요/ 그 길은 풀이 더 많아 걸음을 당기는 듯했지요/ 그 길도 걷다 보면 같은 길이 되겠지만요// …/ 아, 나는 다른 날을 위해 한쪽 길을 남겨두었지요!/ 길은 길에 한없이 이어지는 걸 알기에/ 내가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를 의심하면서도//먼 훗날 어디에선가 나는 한숨 쉬며 이야기할 테지요/ 숲속에 두 갈래 길이 나 있었고/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선택했다고/ 그리고 그것이 모든 걸 바꿔놓았다고  
- 로버트 프로스트 '가지 않은 길' 부분

 

어린이들로 가득찬 울산대공원 환경테마 놀이시설. 울산신문 자료사진
어린이들로 가득찬 울산대공원 환경테마 놀이시설. 울산신문 자료사진

'숲속오솔길'이 내리막길을 내어준다. 벌레와 새와 매미의 노래잔치, 진녹빛 잎사귀의 소곤거림과 능소화 무리의 오렌지빛 조잘거림, 그리고 나무뿌리가 내딛는 보이지 않는 걸음도 고시랑고시랑 속삭여 준다. 킥보드를 끄는 아들과 아빠가 오르막을 오른다. 아들은 해충 이야기를 하고 아빠는 "응응, 그래, 으응," 화답한다. 형과 동생이 자전거를 끌며 오른다. "으아, 숨차다. 우리 쉬었다 가자." "그러자, 형." 한 중년여성은 뒷걸음으로 오르고, 나무 이야기를 하는 부부 곁에서 개망초가 한들거린다. 엄마와 아들 두 팀이 골대에 공 넣기 게임을 하는 '길거리농구장'을 지난다. '가족문화센터'의 주말은 어떤 문화로 넘쳐날까. '청소년광장'을 뛰노는 10대들의 움직임이 싱그럽다. '수국정원' 팻말이 나타난다. 6월 말에 가족여행으로 다녀온 서귀포시의 어마어마한 수국정원이 떠올라 걸음이 빨라진다. 

 

비가 와 수국 향은 더 짙어지고/ 그 향이 당신에게 다녀가는 동안/ 수국은 고스란히 비어 있지/ 에돌고 에돌아 당신에게 가는/ 거리만큼// 수국은 비어 있지/ 해 질 무렵, 나는 텅 빈 당신을 생각해보고/ 물종지 같은 당신을/ 오래오래 생각해보고// 주머니 속/ 쥐고 있던 마른손을 꺼내어/ 젖은 허공에 펴보는 꽃이여/ 아, 수국은 참으로 멀리도 다녀갔지/ 지그시 문을 들어/ 열고/ 닫고  
- 고영민 '수국' 전문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화려한 조명으로 단장된 울산대공원 동문 광장일대. 울산신문 자료사진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화려한 조명으로 단장된 울산대공원 동문 광장일대. 울산신문 자료사진

두 풋살경기장 사이 아담한 비탈에서 갖은 수국이 무향을 내뿜는다. 빨강과 초록 나무의자가 '쥬디' 이름표의 수국 무리 앞에 나란하다, 당신과의 거리만큼. 연인이 사진을 찍고는 한 자전거를 타고 간다. 중년 부부는 꽃이 제법 졌다며 아쉬워한다. 나는 땀 젖은 손으로 마른 꽃을 어루만져 본다. 풋살경기장의 떠들썩함을 뒤로하고, 속 시원히 펼쳐진 '풍요의 못' 앞에 선다. 솟구치는 분수대 물줄기가 어서 풍덩 뛰어들라고 유혹한다. 정문 앞이라 오가는 사람들이 많다. 도심공원이니 인근 주민들에겐 최상의 산책로겠다. 한 견공이 지나는 견공을 불러 머리를 비비고 앞발로 장난을 친다. 명랑소녀에게도 쉴 공간이 나타났다. 낯익은 상호의 커피숍이다. 기다리는 수고쯤이야 아이스아메리카노 잔의 얼음에 다 녹아들었다. '종합안내소' 지킴이에게 장미축제로 성황을 이룬 '장미원'이 궁금해 운을 뗐다. "물론 지금도 다양한 장미가 피어 있고요, 11월 중순까지는 장미를 볼 수 있어요. 가장 화려하게 피는 시기에 축제를 하는 거지요." "바로 옆 건물 '아쿠아시스'가 요즘 인기 좋습니다. 한 번에 천 명이 들어갈 수 있고, 파도풀장은 물놀이에 최고지요. 8월 20일까지 선착순으로 이용할 수 있어 주말 아침엔 긴 줄이 늘어선답니다." 수많은 실루엣이 어른거리는 통유리 안쪽과 옥외수영장에서 물방울이 마구 뛰쳐나오는 듯하다. 

장미축제·파도풀장·테마놀이시설·문화공연 등 사계절 모습 다채

제15회 울산대공원 장미축제 개막식에서 선보인 드론쇼. 울산신문 자료사진
제15회 울산대공원 장미축제 개막식에서 선보인 드론쇼. 울산신문 자료사진

낮은 폭포수가 흐르는 '호랑이발테라스'에선 신발을 벗어두고 첨벙거리는 청소년들로 소란스럽다. 눕혀둔 자전거 몇 대가 더위의 힘을 빌려 바퀴를 굴린다. 수련을 덮어쓴 연못과 정비된 잔디광장이 한껏 푸르다. 270미터 거리의 '메타세쿼이아길'로 든다. 쭉쭉 뻗은 나무 행렬이 발산하는 선선함에 무념무상 갇히고만 싶다. 오래전 들른 남이섬의 메타세쿼이아길도 아련히 떠오르고. '잔디광장' 갈래 길에서 다시 망설인다. 공업탑로터리에 가까운 동문 공원은 '자연학습원'과 '용의발광장'과 '느티나무산책로', '잉어물놀이시설'과 '잉어연못'과 '연꽃연못', '울산대종'과 '옥외공연장'과 '카멜리아정원'으로 걸음할 수 있다. 다 둘러본다면 어흥! 어둑서니가 나타나겠지. '가지 않은 길'을 되뇌다 남문 방향으로 돌아선다. 저녁해를 받은 물빛이 나른하다. 커다란 '풍차' 옆 벤치에서 산책객들의 걸음을 망연히 보며 남은 커피를 들이켠다. 백구를 앞세운 가족의 걸음 맞춤이 정겹다. 사계절 내내 털옷인 견공은 혀를 내밀고 학학대면서도 눈빛이 웃음이다. 그들이 옆 벤치에 앉는다. 뒷다리와 꼬리를 땅에 붙인 백구가 하품을 하곤 나무 둥치 쪽을 가만히 노려본다. "이런 날에도 사람들이 공원으로 몰려나오는 게 참 희한해. 날이 좀 선선해지면 반으로 줄어든다니까.""꼬맹이들은 신나게도 쫓아다니네. 하이구, 저 앤 옷이 다 젖었어.""쟤가 뭘 저리 보나 했더니, 매미가 껍질을 벗고 있네! 신기해라." 숲이 바람 한 줄기를 내려보낸다. 맞은편 '울산대공원 준공기념비'가 높다랗다. 1962년 울산에 정유공장을 설립한 SK주식회사가, 10년간 조성한 울산대공원을 시민에게 헌정한다는 글이 새겨져 있다. 울산대공원은 한일월드컵을 앞둔 2002년 4월에 1차, 2005년 9월에 2차 개장을 했다. 21세의 푸른 청년 나이가 되었다.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저기 저기 저 가을 꽃자리/ 초록이 지쳐 단풍드는데// (…)// 눈이 부시게 그리운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 서정주 '푸르른 날' 부분  

 

김려원 시인 climbkbs@hanmail.net
김려원 시인 climbkbs@hanmail.net

이곳의 눈부신 초록도 그리움에 지쳐 곧 단풍들겠지, 생각하자 더위가 한걸음 물러난다. "일몰 후엔 안전을 위해 자전거운행 금지" 안내방송을 하는 '관리사무실'을 지난다. 8월 20일까지 '야외물놀이장'을 연다는 플래카드가 걸려있다. 여름 초록이 짙어지듯, 여름 사람은 활동적인 게 자연의 섭리일 터다. '북카페 지관서가'에 불이 켜진다. 열매 다 진 벚나무길을 중년의 두 친구가 나란히 걷는다. "공원을 걸으면 넓어지는 공간으로 쭉쭉 나가는 것 같고 속까지 훅 넓어지는 느낌도 들어서 좋더라구. 이제 마스크를 안 쓰니까 말을 안 해도 입이 저절로 열리는 기분이고.""나는 멍때리며 걷는 게 좋더라고. 하늘을 보면 그리운 사람 생각도 나지만 감정은 맑아지는 것 같아." 놀이터에서 한 아빠가, 이제 집에 가자며 아이를 어른다. 아이는 원통미끄럼틀 안이 좋고. 배드민턴을 치는 가족의 웃음이 파란 수국을 닮았다. 남문 주차장이 보일락 말락 한다. 김려원 시인 climbkb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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