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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좋은 날이면 일본 대마도(쓰시마)가 보일 정도로 동해가 한눈에 들어온다는 치술령 경주 망부석에서 바라 본 풍경.
날씨가 좋은 날이면 일본 대마도(쓰시마)가 보일 정도로 동해가 한눈에 들어온다는 치술령 경주 망부석에서 바라 본 풍경.

 

영남알프의 변방에 위치한 치술령은 호미지맥(虎尾枝脈)이 북동진하면서 솟구친 봉우리다. 신라 때 박제상의 부인이 남편을 그리워하며 세 딸을 데리고 치술령에 올라 왜국 쪽을 바라보며 통곡하다가 몸은 죽어 망부석(望夫石)이 되고, 혼(魂)은 새가 돼 국수봉의 바위 동굴로 숨어들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는 곳이다. 치술령에 올라서면 날씨가 좋은 날이면 일본 대마도(쓰시마)가 보일 정도로 동해가 한눈에 들어온다.

 치술령 정상에서 일본 땅 바라보니/ 하늘에 닿은 동해 물결, 가없어라./ 내 님 떠나실 때 손만 흔들어 주시더니/ 죽었는지, 살았는지 소식조차 끊어졌네/ 소식조차 끊어졌네, 영원한 이별이여/ 죽든지 살든지 언젠가는 만나겠지/ 하늘 보고 울부짖다 망부석이 되었으니/ 열녀 기상 천 년 동안 저 하늘에 푸르리라. 述嶺頭望日本/ 粘天鯨海無涯岸/ 良人去時但搖手/ 生歟死歟音耗斷/ 音耗斷長別離/ 死生寧有相見時/ 呼天便化武昌石/ 烈氣千載干空碧(송수환 역)

 

박제상 부인과 두 딸의 혼이 새가되어 바위틈에 숨어들었다는바위 굴.
박제상 부인과 두 딸의 혼이 새가되어 바위틈에 숨어들었다는바위 굴.

 

 이 시는 세조 때 경상좌도 병마평사로서 울산에 약 2년간 머문 점필재 김종직이 지은 '치술령곡'이다. 치술령과 치술신모가 가진 의미를 담은 '치술령곡'은 왜로 떠난 박제상을 동해 바다가 훤히 바라다보이는 치술령에 올라 동해 바다를 애타게 바라보며, 그리다 죽은 그의 부인에 관한 것으로 '치술령述嶺頭(악부)'에 실려 있는 대목으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왜·고구려 볼모로 간 눌지왕의 두 아우 구해 

신라 눌지왕이 왕위에 오른지 9년 되는 을축년(425)에 여러 신하와 사람들을 불러 잔치를 베풀었다. 이 자리에서 왕이 여러 신하에게 “예전에 돌아가신 우리 아버님께서 성심으로 백성을 위하신 까닭으로 사랑하는 아들을 동쪽의 왜에 보내었다가 보지도 못하고 돌아가셨다. 짐 또한 고구려가 화친하자고 하여 사랑하는 아우를 고구려에 보냈으나 고구려 역시 잡아두고 돌려보내지 않았다"며 슬퍼했다.

 관리들이 삽라군 태수 제상이 적임이라 추천했다. 이에 왕이 제상을 불러서 물으니 제상이 두 번 절하고 말하기를 “신이 듣기로는 임금에게 근심이 있으면 신하가 욕을 보고, 임금이 욕을 보면 신하는 죽어야 한다고 했사옵니다. 신은 비록 똑똑하지 못하나 왕명을 받들어 행하고자 하나이다" 했다. 왕이 그를 매우 가상히 여겨 술잔을 나누어 마시고 당부했다.

 박제상은 신라 눌지왕(417~468) 때의 충신이다. 박제상이 왕의 명을 받고 고구려에 들어가 고구려 장수왕을 설득해 눌지왕의 아우 보해를 데려왔다. 그런데 이번에는 왕이 미해를 그리워하자, 박제상은 고구려에서 돌아오자마자 집에도 안 들리고 왜국으로 향했다. 그의 처가 뒤쫓아 율포(栗浦·양남면 하서 4리로 진리마을 부근으로 추정)에 이르러보니 남편은 이미 배 위에 있는지라. 부르며 크게 울었으되 박제상이 다만 손만을 흔들고 갔다.

 박제상은 왜국에 도착해 “계림왕이 아무 죄도 없는 우리 부형을 죽였기로 도망해서 여기 온 것입니다"며 거짓으로 말했고  왜왕은 이 말을 믿고 제상에게 집을 주어 편히 거처하게 하였다.

 이때 제상은 미해를 모시고 해변에 나가 놀면서 물고기와 새를 잡아 왜왕에게 바치니 왜왕은 매우 기뻐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어느 날 새벽 마침 안개가 자욱하게 끼었는데 제상이 미해에게 말했다. 

 “지금 빨리 계림으로 떠나십시오." 

 미해는 “그러면 같이 떠나십시다"라고 했으나 제상은 “신이 만일 같이 떠난다면 왜인들이 알고 뒤를 쫓을 것입니다. 원컨대 신은 여기에 남아 뒤쫓는 것을 막겠습니다" 

 “지금 나는 그대를 부형처럼 여기고 있는데 어찌 그대를 버려두고 혼자서만 돌아간단 말입니까?"

 “신은 공의 목숨을 구하는 것으로, 대왕의 마음을 위로해 드리면 그것만으로 만족할 뿐입니다. 어찌 살기를 바라겠습니까"

 당시 신라 사람으로 일본에 가 있던 계림 사람 강구려가 왜국에 와 있었는데 그를 딸려 호송하게 했다. 미해를 떠나보내고, 제상은 미해의 방에 들어가서 이튿날 아침까지 있었다. 미해를 모시는 좌우 사람들이 방에 들어가 보려 하므로 제상이 나와서 말리면서 말했다. “미해공은 어제 사냥하는 데 따라다니느라 몹시 피로해서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저녁때가 되자 좌우 사람들은 이상히 여겨 다시 물었다. 이때 제상은 대답했다. “미해공은 떠난 지 이미 오래 되었소"

 좌우 사람들이 급히 달려가 왜왕에게 고하자 왜왕은 기병을 시켜 뒤를 쫓게 했으나 따르지 못했다.

 

울산 망부석.
울산 망부석.

 

삼국유사에 기록된 박제상 처형

왜왕은 박제상을 가두고 물었다. “너는 어찌하여 너의 나라 왕자를 몰래 돌려보냈느냐?"

 제상이 대답하기를 “나는 계림 신하이지 왜국의 신하가 아니오. 이제 우리 임금의 소원을 이루어 드렸을 뿐인데, 어찌 이 일을 그대에게 말하겠소"

 왜왕은 노했다. “너는 이미 내 신하가 되었는데도 계림 신하라고 말하느냐. 그렇다면 반드시 오형(五刑)을 갖추어 너에게 쓸 것이다. 만일 왜국 신하라고만 말한다면 후한 녹을 상으로 주리라" 

 제상은 “차라리 계림의 개나 돼지가 될지언정 왜국의 신하가 되지는 않겠다. 차라리 계림의 형벌을 받을지언정 왜국의 작록(爵祿-관작과 봉록)을 받지 않겠다"

 왜왕은 노하여 제상의 발 가죽을 벗기고 갈대를 벤 위를 걸어가게 했다. 그리고는 다시 물었다. 

 “너는 어느 나라 신하냐?"

 “계림의 신하다."

 왜왕은 또 쇠를 달구어 그 위에 세워 놓고 다시 물었다. 

 “너는 어느 나라 신하냐." 

 “계림의 신하다." 

 왜왕은 그를 굴복시키지 못할 것을 알고 목도라는 섬에서 불태워 죽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박제상 유적지내에 있는 박제상추모비.
박제상 유적지내에 있는 박제상추모비.

 

망부석(望夫石)이 된 박제상 부인

박제상 부인과 관련된 망부석과 은을암은 '울산읍지'(1934년)에 나온다. 망부석은 치술령 꼭대기에 있다. 신라 눌지왕 2년 박제상이 왜국에서 죽자 그의 처 김씨가 슬픔과 원망을 이기지 못해 두 딸을 거느리고 이 산에 올라 왜국을 바라보며 통곡하다가 죽어 치술신모가 되었고 몸은 돌로 화하였고, 혼은 새가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영혼은 날아가 숨었는데 그곳을 은을암이라 부른다고 기록되어 있다. 

 

 두 개의 망부석과  은을암

망부석은 치술령 정상에서 보면 양쪽 두 곳으로 나누어져 있다. 하나는 경주 망부석으로 불리며 동해 바다가 훤히 바라다 보이는 곳에 있고, 또 다른 하나는 그 반대편에 있는 것으로 울산 망부석이라 부른다. 망부석(경주)이 있는 곳으로 내려서면 울산 북구와 동해 수평선이 아스라이 펼쳐지고 왜로 떠난 남편을 기다리다가 부인은 죽어서 화석이 됐다는 망부석이 있다. 이 망부석을 두고 작금의 사람들이 설왕설래하고 있다. 울산, 경주 쪽으로 전해지는 두 개의 바위가 있지만 정확히 고증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어느 쪽이 망부석이라고 단정 지을 수 없다. 그러니 필자가 바라보는 시각은 경주 쪽의 망부석이 타당성이 있을 것으로 추론해본다. 은을암은 울산광역시 기념물 제1호로 새가 숨은바위. 즉 숨길 은(隱) 새 을(乙) 암자 암(庵)으로 새가 숨은 바위로 해석된다. 

 

박제상 유적지 치산서원경관(울산기념물 제1호).
박제상 유적지 치산서원경관(울산기념물 제1호).

 

 박제상유적지 치산 서원

진희영 산악인·기행작가
진희영 산악인·기행작가

울산광역시 기념물 제1호로 등록 되어있는 치산서원은 울주군 두동면 만화리 산 30-2에 있는 곳으로 박제상의 아내를 기리는 신모사가 있던 곳이다. 조선시대에 서원으로 박제상의 부인과  두 딸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으로 서원 옆 박제상기념관 앞마당에는 삼 모녀상이 세워져 있고 뒤뜰에는 '신라충신박제상추모비'가 있다. 

 '역사는 사라진 시간이 아니라 살아 있는 과거다'라는 말을 잠시 떠올려보면서 신라충신 박제상과 그의 부인 망부석에 대한 설화를 더듬어 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참고문헌
-허목(許穆 1595~1682) <신라세가〉
-울산읍지
-서라벌의 망부석(아직도 울음 운다) 김대원 著 


 

호미지맥이란

호미지맥(虎尾枝脈)은 낙동정맥 고현산(1,034m)과 단석산(827m) 사이에 위치한 백운산(892m) 북쪽의 세번째 봉우리인 삼강봉(845m)에서 동쪽으로 분기해서 천마산(620.5m)과 경부고속도로를 지나 치술령에서 북동진하여 포항의 호미곶까지 이어지는 도상거리 98km인 산줄기를 말한다. 이 산줄기는 형산강의 남쪽 수계 역할을 한다고 하여 형남기맥이라 부르기도 하지만, 땅끝기맥, 진양기맥처럼 지역의 특수성을 살려 호미기맥 이라 부른다. 이 산줄기 북쪽으로 흐르는 물은 형산강으로, 남쪽으로 흐르는 물은 태화강으로, 그 중 일부는 장기천, 대화천으로 흘러 동해바다로 합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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