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삽화 장세련.
삽화 장세련.

장꾼들과 산사람들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연대감이 형성되어 있었는데 오늘만큼은 달랐다. 먼저 마구령을 넘었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순흥 장터에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털보 대신에 엉뚱한 놈이 나타나 대장행세를 하고 있는데 심보가 고약하다는 것이었다. 털보를 맨손으로 간단하게 제압할 만큼 무술도 뛰어난 데다가 성정도 난폭해 반항하던 장꾼 하나가 목숨을 잃었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그런 소문 때문에 장꾼들이 이선달을 기다려 함께 고개를 넘었던 것이다.

 "어때? 요기는 든든히 했는가? 내 짐 속에 육포가 조금 있는데 내어 줄까?"

 장 노인도 앞으로 벌어질 일이 은근히 걱정되었다. 이선달의 힘으로 산 사람들을 다스리지 못하면 자신들의 생계가 힘들어질 것은 불 보듯 뻔했다. 마구령 초입의 주모도 장 노인과 같은 염려로 윤미를 시켜 인절미까지 보내온 것이다. 마구령을 장꾼들이 넘지 못하면 자신의 장사도 종을 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너무 염려 마십시오. 안 그래도 윤미가 인절미를 가져와서 지금 다 먹고 물을 마신 참이었습니다."

 "그럼 되었네. 속이 든든해야 싸움을 해도 밀리지 않을 것 아닌가. 우리 같은 좀생이들도 자네 같은 젊은이가 있어 든든하네. 나에게 딸이 있었으면 사위로 삼고 싶네."

 "말씀만 들어도 고맙습니다."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어느새 고갯마루가 가까워졌다. 이선달은 걸음을 멈추고 잠시 짐을 진 채로 어깨를 돌려 긴장을 풀었다. 장 노인이 짐을 벗어 자기에게 넘겨달라는 걸 사양했다. 

 이선달은 가볍게 한숨을 내 쉬고 얼마 남지 않은 고갯마루를 향해 걸었다. 일행들은 벌써 고갯마루에 도착하기 시작했다. 예전과 다름없이 산사람 두 명이 일행 앞에 나타났다. 두 사람 모두 새파랗게 젊은 애송이였다.

 "형님들 안녕하시었소?"

 "그래 너희도 잘 있었지?"

 "잘 있긴유. 우린 이제 죽을 지경이유."

 "무슨 일이 있었나?"

 "가보면 아실 거구먼요. 형님들을 산채로 모시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누가 말인가. 자네들 털보 대장이 말인가?"

 "아니유. 털보 대장님은 이거 됐어요."

 한 녀석이 손날로 목을 베는 시늉을 해 보였다. 장꾼들은 녀석의 익살스러운 표정에 웃음을 터뜨렸다.

 "지금 웃을 일이 아니구먼요. 형님들도 이제 성가신 일을 당할 거구먼요."

 장꾼들은 어린 산사람들을 따라 산채로 향했다. 산채는 고갯마루에서 산 옆구리를 끼고 삼백 보쯤 떨어진 곳에 있었다. 가파른 산비탈에 어떻게 저런 평지가 있을까 싶게 평탄한 지대가 있었다. 높은 산중이지만 물이 있어 여러 명이 기거하기에 불편함이 없었다. 이선달도 장꾼들의 뒤를 따라 산채로 들어섰다. 산채 마당에는 장꾼들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여러 명이 줄을 지어 기다리고 있었다. 줄의 맨 좌측 끝에 털보의 모습이 보였다. 눈만 빼꼼 내놓고 코와 잎을 가렸어도 털보인지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어이. 잘 있었나?"

 이선달이 줄 끝에 있는 털보에게 손을 들어 인사했다. 털보는 아는 체도 하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어이. 거기."

 줄 가운데 서 있던 낯선 얼굴이 손에 들고 있던 합죽선으로 이선달을 가리켰다.

 "저 말입니까?"

 이선달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새로 온 사내를 바라보았다. 중키에 이목구비가 뚜렷한데 눈매가 날카로워 보였다. 나이는 얼추 이선달과 같은 또래로 보였다.

 "그래 너 말이다. 왜 촌놈처럼 분위기 파악을 못 하고 얼쩡거리느냐."

 이선달은 느린 걸음걸이로 새 두목 앞으로 걸어갔다. 이선달이 한 걸음만 더 떼어놓으면 손끝이 닿을만한 거리였다. 새 두목의 합죽선 끝이 이선달의 목젖으로 날아왔다. 이선달이 허리를 틀어 합죽선을 피했다. 그런 다음 합죽선의 공격을 무력화시킬 목적으로 몸을 바짝 붙였다. 순간 이선달의 눈에서 번갯불이 번쩍 튀었다. 사내가 합죽선을 쥔 손등으로 이선달의 이마를 살짝 쳤다. 제삼자가 보기에는 장난으로 살짝 친 것 같았다. 이선달이 맥없이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아버렸다. 김태환 작가

저작권자 © 울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