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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 장세련
삽화 장세련

"에구, 짐을 내팽개치면 어떻게 처자식을 먹여 살리겠나. 똥구녕이 찢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옹기 짐은 지켜야지."

그 말에 옹기 장수는 서글픈 생각이 들어 눈물을 찔끔 짰다. 정말 처자식을 먹여 살리느라 밑구멍이 빠지도록 옹기 짐을 져야 하는 신세였다. 사는 게 모두 만만하지는 않겠지만 새삼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새 두목은 옹기장수가 눈물이라도 쏟으며 울 것 같았는지 목각 양물을 내려놓고 다른 물건을 뒤적거렸다. 이선달은 그러는 새 두목을 긴장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이제 겨우 제정신이 돌아온 듯했다.

새 두목이 집어 들려 하는 것은 길이가 두 자하고 세 치쯤 되는 기다란 물건이었다. 삼베로 곱게 싸 놓았는데 얼핏 보기에 기다란 장죽 같아 보였다.

"이건 장죽 같아 보이는구먼. 뭘 이렇게 칭칭 감아놓았대."

새 두목이 물건을 집어 들려는 순간이었다. 이선달이 한걸음에 달려들어 새 두목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빠르기가 바람 같았다. 갑자기 물건을 들려다 말고 뒤로 쿵 소리를 내며 나가떨어졌다. 눈을 빤히 뜨고 있던 사람들도 어떻게 발길질을 했는지 몰랐다.

뒤로 나가떨어진 새 두목은 얼이 빠진 듯 한참 동안 같은 자세로 바닥에 누워 있었다. 산 사람들과 장꾼들이 모두 술렁거렸다. 이제 싸움은 본격적으로 시작될 판이었다. 이선달이 얼른 짐 속에 들었던 삼베에 쌓인 물건을 집어 들었다.

삼베를 풀어내자 뱀 껍질을 닮은 칼자루가 나타났다. 삼베를 모두 벗겨내자 물건의 실체가 드러났다. 칼자루는 물론이고 칼집도 어피로 만든 고급스러운 칼이었다. 길이에 비해 자루와 몸통이 좀 가늘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선달이 칼집에서 칼을 뽑아 들었다. 칼날의 넓이는 한 치가 채 되지 않는 가느다란 세장검이었다. 저녁 햇빛에 검광이 눈부셨다.

이선달이 검을 뽑아 들 때까지 새 두목은 엉덩이를 땅에 깔고 앉아있었다. 산 사람들과 장꾼들은 칼을 뽑아 든 이선달을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방물장수의 보따리 안에 칼이 있으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더구나 그 칼이 흔하게 볼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신분이 높은 사대부 집안에나 있을 귀한 것이었다.

새 두목이 부스스 일어나 엉덩이의 먼지를 털었다. 바닥에 떨어진 합죽선을 찾아들더니 이선달을 바라보며 빙긋이 웃었다.

"오랜만에 사내 같은 놈을 만나보는구나. 칼을 믿고 한번 해보겠다는 것이구나. 잠깐 기다려라. 이 귀찮은 물건들은 모두 치워라."

새 두목이 호통을 치자 장꾼들은 재빨리 풀어놓은 짐을 쌌다. 이제 믿는 것은 이선달뿐이었다. 이선달이 잘만 해준다면 다시 짐 보따리를 풀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칼을 들고 있는 이선달이 예전보다 훨씬 듬직해 보였다.

산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자기들의 새 두목이라고는 하지만 이겨주기를 바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느닷없이 나타난 근본도 모르는 새 두목에게 자리를 빼앗긴 털보는 더더욱 이선달의 편이었다.

[2] 두목

털보가 마구령에 나타난 것은 2년 전이었다. 그전에는 산적들이 떼를 지어 생활하지는 않았다. 마구령 고갯길이 너무 험하다 보니 패거리를 지어 살기에 적당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각자 여기저기에 움막을 치고 생활했다. 장꾼들을 터는 것도 여럿이 떼를 지어 고개를 넘을 때는 감히 나서지도 못했다. 혼자 고개를 넘거나 서너 명이 고개를 넘으면 장도를 들고 나타나 위협을 가했다. 장꾼들도 산적에게 걸리면 가진 물건을 몽땅 털리는 걸 각오해야 했다. 심하면 먼저 오르막에서 물건을 몽땅 털린 장꾼을 고개 넘어 내리막길에서 또 다른 산적이 붙들어 입고 있는 옷까지 발가벗겨 보내는 경우도 있었다.

산적들에게 털리는 일이 다반사로 많아지고 산적들의 숫자도 점점 불어나자 장꾼들은 재를 넘을 때 꼭 무리를 지어 넘어 다녔다. 그러니 산적들로선 먹고살기가 점점 힘들어졌다. 그때 나타난 것이 털보였다. 털보는 타고난 완력으로 산적들을 제압했다. 어지간한 장정은 한 손에 한 명씩 틀어쥐고 팔랑개비를 돌렸다. 산적들은 알아서 털보의 밑으로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털보는 산적들이 한꺼번에 모여서 생활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다. 마구령은 고개를 넘자마자 수량이 풍부한 골짜기가 흘렀다. 고갯마루에서 남대 주막거리 까지는 계곡을 끼고 내려가는 내리막길이었다. 

털보는 산길과 계곡이 조금 떨어진 곳에 터를 잡고 여러 채의 산막을 지었다. 마당도 제법 널찍하게 만들어 단체로 운동을 할 수 있도록 했다. 체력단련을 위해 마당 한가운데 모래를 깔고 씨름을 시키기도 했다. 장꾼들은 털보가 나타나자 산적을 피해갈 방법이 없었다. 무리를 지어 움직여도 무기를 소지한 산적들을 상대하다가는 몸을 다칠 수가 있었다. 꼼짝없이 산적들의 요구를 들어주어야 했다. (월·수·금 게재됩니다) 김태환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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