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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 장세련
삽화 장세련

이선달이 칼을 뽑는 경우는 흔하지 않았다. 최후의 수단이 아니면 칼을 사용하지는 않았다. 어지간한 상대는 이선달의 발차기에 명치나 부샅을 차이면 숨이 끊어지고 말았다. 주먹으로 상대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그런 경우는 아주 하수들에게나 사용했다. 

이선달의 발차기 특징은 현란한 몸놀림에 있었다. 남사당패에서 줄타기를 배웠던 이선달은 몸의 균형을 잡는데 남다를 재주가 있었다. 공중발차기를 할 때는 한 마리의 제비가 공중에서 재주를 부리는 것 같았다. 이선달을 상대로 붙어본 적들은 공격의 거리와 방향을 맞추는 게 쉽지 않았다. 정면을 공격하면 순식간에 방향을 틀어 뒤쪽으로 가있었다. 바로 코앞에 있어 공격하면 순식간에 다섯 걸음쯤 물러났다.

아직 이선달은 싸움에서 패해본 적이 없었다. 부득이 강한 상대를 만나면 이기는 수를 찾기까지 정면 승부를 피했다. 그러나 이번 승부는 성격이 달랐다. 산적들과 장꾼들을 아우르는 질서가 무너지면 자신이 설자리가 궁색해 지는 것이었다.

이선달은 칼을 잡은 손을 옆구리에 대고 왼 손을 칼날보다 앞으로 내민 자세를 취했다. 상대는 조금도 당황한 기색이 없었다. 이선달의 발에 차인 무릎을 슬슬 문지르면서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리를 약간 저는 듯하다가 이내 제 자세로 이선달 앞에 섰다.

"네가 이선달이란 놈이렷다. 벼룩의 간을 내어 먹지 불쌍한 산꾼들 등을 처먹었느냐? 칼을 품고 다니는 걸 보니 예삿놈이 아니구나. 세상천지가 한 대감의 손바닥 안에서 놀아난다고 하더니만 네 놈도 그쪽의 끄나풀이렷다?"

이선달이 움찔했다. 한 대감이란 말 한마디 때문이었다. 조선 천지에 힘 좀 쓴다는 자들이 모두 끄나풀을 잡기 위해 한 대감 댁으로 몰려들었다.    

"네놈이야말로 주먹 하나 믿고 한 대감댁 대문 앞에서 얼씬거리다 쫓겨난 게로구나. 안 그러면 산적질이 무슨 벼슬이나 되는 줄 알고 여길 기어들어 온 것이냐?"

"하하하."

새 두목은 두 손으로 배를 움켜잡고 웃었다. 싸울 의사가 전혀 없는 사람처럼 느긋하게 굴었다. 오히려 이선달이 초조했다.

"호들갑은 그만 떨고 어서 덤벼보아라. 뱃가죽에 구멍이 뚫리기 전에 이름자나 남기던가."

"내 이름은 노각수라고 한다. 한때는 함길도에서 좀 놀았느니라. 우는 아이도 각수가 온다면 울음을 뚝 그쳤단다. 사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선달은 함길도라는 말에 또 한 번 놀랐다. 함길도는 북방에 접해 있어 늘 크고 작은 전쟁을 치르는 곳이었다. 북방의 방어가 허술해 지면 여진족이 쳐들어와 분탕질했다. 함길도 사람들은 군사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스스로 몸을 지키기 위해 병기술 한 가지쯤은 익히고 있었다. 그런데 노각수란 자가 거기에서도 이름을 날리던 자라 하니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노각수인지 나팔수인지 몰라도 함길도에서 왔다면 필시 계유년에 이징옥  장군의 밑에 있다가 도망쳐 온 놈이 분명하겠구나. 내가 네놈을 잡아다가 반역자로 순흥 관아에 넘길 것이다."

"하하하. 이제야 네가 정체를 밝히는구나. 네 놈이 필시 한 대감의 끄나풀이 분명하렷다. 어린조카를 왕좌에서 몰아낸 패악 잔당의 끄나풀이렷다. 어디 오늘 나한테 혼 좀 나 보아라."

노각수가 두 주먹을 움켜쥐고 자세를 잡았다. 노각수의 자세는 특이했다. 양쪽 무릎을 어깨너비로 벌리고 무릎을 약간 구부린 기마자세로 두 주먹은 옆구리에 대고 정면을 향해 섰다. 칼로 정면을 찌르기에는 아주 좋은 표적을 만들고 있었다. 

이선달이 노각수의 허접한 자세를 만만히 보고 정면 찌르기로 들어갔다. 뱃가죽을 한칼에 구멍 낼 요량이었다. 이선달의 찌르기 동작이 끝나자 노각수의 몸은 정면이 아닌 오른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느새 오른발이 뒤로 물러나 어깨너비로 왼발 옆에 서 있었다. 몸의 자세는 하나도 바뀌지 않고 방향만 오른쪽을 향하고 있었다. 깊게 찌르고 들어간 칼날이 그의 몸 앞에 있었다. 노각수의 왼 주먹이 짧게 나왔다 들어갔다. 주먹은 칼을 쥔 이선달의 오른 손목을 살짝 건드리고 들어갔다.

이선달은 손목을 쇠망치로 내려치는 듯한 통증에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권법이 특이한 데다 파괴력도 엄청났다. 이선달은 칼을 쥔 손을 그대로 아래로 내려 땅을 짚었다. 머리도 손을 따라 내려오는가 싶더니 날짐승처럼 공중제비를 돌았다. 이선달의 짚신 바닥이 노각수의 뺨을 걷어찼다. 노각수의 기마자세가 풀리며 서너 걸음 뒤로 물러났다. 

두 사람의 대결을 지켜보는 장꾼들과 산 사람들은 손에 땀을 쥐었다. 이선달이 공격을 당할 때는 자신이 얻어맞은 것처럼 어이쿠 소리를 질렀다. 첫 합을 주고받은 이선달은 섣불리 칼을 뽑아 든 걸 후회했다. 원래 이선달의 주무기는 칼이 아니었다. 칼은 마지막 수단으로 이미 제압한 적의 숨통을 끊을 때 사용하거나 기습을 할 때 사용했다.

공격을 당한 노각수도 이선달의 칼보다는 발차기가 무섭다는 걸 금방 깨달았다. 칼의 공격을 피한 뒤 다음 동작도 신경을 쓰지 않으면 쉽게 발차기에 당하게 되었다. 노각수는 여전히 기마자세로 마주 섰다. 반면에 이선달은 칼을 찌르기 자세에서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내려치기 자세였다. 내려치기는 찌르기보다는 치명적이지 않지만, 목의 대동맥을 정확히 가격한다면 단칼에 승부를 낼 수도 있었다.

노각수는 재빠르게 이선달의 의도를 눈치챘다. 칼을 다루는 게 능숙하지 않으니 눈속임을 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함부로 정권 치기를 시도했다가는 장난처럼 내려친 칼날에 손목을 잘릴 수도 있으니 조심해야 했다. 노각수의 생각처럼 이선달의 칼이 그냥 허공을 가르며 내려왔다. 상대의 주먹을 경계하겠다는 방어 동작이었다. 칼은 방어용으로 쓰고 기회를 보아 발차기로 들어가겠다는 동작이었다. 

내려친 칼을 다시 비틀어 반대로 내려쳤다. 그냥 그 자리에서 내려친 것이 아니라 반 보 앞으로 나서며 내려쳤다. 노각수는 재빨리 걸음을 뒤로 옮겼다. 칼날이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칼날을 피하기는 쉽지만 몸이 따라 들어오지 않으니 반격이 어려웠다. 이선달이 그걸 알고 하는 공격이었다. 재수가 좋으면 손목이라도 칼끝에 걸리라는 식이었다.

이선달의 계속된 공격에 노각수는 속수무책으로 피하기만 했다. 산 사람들과 장꾼들은 이선달이 계속 유리하게 끌고 가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생각 같아선 계속 허공만 벨 것이 아니라 시원하게 멱을 따거나 뱃가죽을 갈랐으면 싶었다. 

그러나 시간만 자꾸 흘러갈 뿐 두 사람의 승부는 쉽게 날 것 같지 않았다. 이선달은 칼을 수십 번을 흔들었어도 겨우 노각수의 옷소매를 살짝 베었을 뿐이다. 지쳐 가는 건 이선달이었다. 노각수는 한번도  옆구리에 붙인 팔꿈치를 떼지 않았다. 쓸데없는 공격을 하다가 오히려 손목을 다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오히려 체력을 낭비하지 않는 좋은 방법이기도 했다. (월·수·금 게재됩니다) 김태환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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