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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 ⓒ왕생이

 

이쯤에서 청자다방 분위기를 알 수 있게 필자가 공연을 위해 쓴 연극 대본을 소개한다. 제목은 『청자다방 미스 김』이다.

 같은 날 오전 10시, 청자다방 영업 시작.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흐른다.

 다방 문이 열리면서 무릎 위 한참 올라간 미니스커트를 입은 여자 손님 1, 2, 3이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는 듯 우르르 몰려든다. 이들은 다방에 들어서자마자 뮤직 박스 앞 탁자로 몰려간다. 이들이 DJ 오빠와 눈길이 마주치자 DJ 오빠는 기다렸다는 듯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 후속곡으로 최병걸의 노래 '난 정말 몰랐었네'를 들려주면서 가볍게 이들과 눈인사를 한다. 레지들은 엽차 잔을 나르느라 정신없이 바쁘다. 잠시 후 남자 손님 2가 들어와 자리에 앉는다.

 여자 손님 1, 탁자 위에 놓인 신청곡 메모를 급히 챙겨서 김인순이 부른 '여고 시절'을 적는다. 그리고는 껌 한 개를 메모지에 싸서 쪽지와 함께 뮤직 박스에 밀어 넣는다. 약간 상기된 표정으로 자리로 돌아와서는 뮤직 박스를 애정 가득한 눈길로 바라본다.

 DJ 오빠 : (특유의 장발을 앞에서 뒤로 확 쓸면서) 오늘의 첫 곡은 김인순의 '여고 시절'입니다. 노래가 나가기 전, 이 노래 신청하신 분을 만나봅니다. 어디 계세요?

 앞쪽에 앉아 있던 여자 손님 1이 손을 든다.

 DJ 오빠 : 아! 바로 앞에 계셨군요. 올해 춘추가 어떻게 되세요. 그리고 안면 있는 얼굴입니다. 다방에 자주 오시죠? 오실 때마다 이 노래를 신청하시는데 그럴만한 이유가 있나요? 

 여자 손님 1 : (부끄러운 듯 엽차를 홀짝거리면서) 아가씨 나이는 비밀이라서 밝힐 수 없고예. 별다른 이유라기보다는 여고 시절 무지 좋아했던 총각 샘이 계셨는데 제가 졸업하고 결혼하자 캤더니 그만 이듬해 다른 학교로 전근 갔뿟어예. 그때 내 심정 알지예, 참말로 죽을라꼬도 했어예. 못살겠데예, 하지마는 지나고 보니 세월이 약이드라고예. 그라고 중요한 것은 DJ 오빠님이 우리 샘과 진짜 판박이로 닮았습니다. 그 바람에 이 다방 단골이 됐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시절 기분으로 늘 밥 먹기 전에 물 마시듯 이 노래를 들어야 오늘 하루가 무사해집니다. (DJ 오빠가 묻지도 않았는데 약간 통통한 몸매를 숨기듯) 나 여고 시절은 많이 예뻤어예. 

 손님들 웃는다. (중략)

 젊은 날 이 다방을 단골로 드나들던 시절의 아릿한 추억 이야기 가운데 한 대목이다. 

 청자다방 입구에서 강변으로 나오다 만나는 첫 골목으로 들어섰다. 중앙시장에서 학성동 울산역으로 나가는 주요 골목으로 그때는 리어카 상인들이 자릿값을 내고 장사를 했을 만큼 북적였다. 이 거리에 점포 하나 있으면 똥배 내밀고 부자 소리 듣던 중앙시장 골목도 지금 한산하기는 마찬가지다. 떡볶이 가게 앞에 몇몇 청춘들이 있고 갯장어(일명 꼼장어) 골목으로 나가는 길은 한낮이라서 그런지 썰렁하다. 

 태화극장 터는 수년 전부터 멀티플렉스 영화관(복합영상관)으로 개관했다. 태화극장에서 중부소방서로 가다 태화강변으로 돌아나가는 사거리 송암약국 건너편에 울산 극장, 몇 걸음 더 가서 오른편에 그랜드호텔과 벽을 경계한, 지금은 사라진 천도극장이 있었다. 그때는 극장과 다방이 최고 문화시설로 인정받았다. 

 그때만 해도 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나온 청춘들이 우선 1차로 들르는 곳이 다방이었다. 여러 다방이 있었지만, 청자다방이 청춘들에게는 0순위였다. 요즘으로 치면 남구 신정시장 칼국수 골목처럼 유독 한 집만 줄을 서는 현상과 비슷했다. 영화가 끝나면 청자다방에 먼저 들어가기 위해 뛰었던 기억이 새롭다. 

 청자다방 레지들에게 단골로 인정받았던 그때가 내 인생에서도 봄날 파릇한 싹을 피워 올렸던 청춘의 황금기였음은 분명하다.

 7080 청춘들은 김만수의 '푸른 시절'처럼 

 하늘과 땅 사이에 꽃비가 내리더니/ 오늘은 공원에서 소녀를 만났다네

 수줍어 말 못 하고 얼굴만 숙이는데/ 앞서간 발자국이 두 눈에 가득 차네

 찡하는 마음이야-아 뭐라고 말 못 해도/ 찡하는 마음이야-아 뭐라고 말 못 해도

 찡하는 마음이야-아 괜시리 설레는 걸

 이 노래는 1977년 세상에 나오자마자 크게 히트했다. '푸른 시절'을 부르며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한껏 젊음을 누렸던 그때가 아무리 생각해도 네게는 참 아름다웠던 시절이었다.

연극 '청자다방 미스김' 공연.
 

어느 날 금지곡 쏟아지다

1970년대 말 대마초 파동 이후 1980년대 들어서면서 청춘들의 인기를 얻은 곡들이 대거 금지곡으로 지정됐다. 그 당시는 어떤 이유인지 몰랐고 한마디 대꾸도 못 하고 멍한 상태에서 당했다. 사회 분위기는 얼음장처럼 더 차가워져 갔다. 서로 눈치를 보듯 하며 살아야 하는 세상이었다. 

 청춘들은 이런 억압된 공포 분위기를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해방구가 필요했다. 이때 음악다방이 그들을 불러들였다. 그 시절 아이러니한 것은 음반 시장이 금지곡 지정 등으로 된서리를 맞은 것과는 반대로 음악다방들은 장사가 잘됐다. 금지곡 지정으로 방송에서 들을 수 없는 노래들을 신청하는 열광적 팬들이 늘어나면서 음악다방들은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금지곡들이 폭발적인 사랑을 받는 기현상이 일어났다. 민족문제연구소가 정리한 그 노래 중 몇 곡을 옮겨 적는다. 신중현과 엽전들 '미인', 이장희 '그건 너', 김민기 '아침이슬' 김추자 '거짓말이야', 이미자 '동백 아가씨', 이금희 '키다리 미스터 김', 배호 '0시의 이별', 송창식 '왜 불러', 양희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김정미 '바람', 한대수 '행복의 나라로' 등등이다.

 이미자의 동백 아가씨는 국내 최초 음반 판매량 10만 장(35주간 가요 순위 1위)을 돌파한 국민가요였지만 일본 엔카 스타일 창법으로 왜색가요 논란이 있었고 그래서 금지곡으로 지정됐다. 배호 '0시의 이별'은 통행 금지시간을 넘겼다고 해서, 송창식의 '왜 불러'는 장발 단속을 할라치면 '왜 불러' 하고 도망간다는 것 때문에, 여하튼 금지곡이 된 이유도 각양각색이었다. 양희은은 어느 날 방송에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은 가사가 퇴폐라고 해서 금지됐다"라고 했다. 그 시절 금지곡이 된 사연들은 들을수록 이해 불가지만 가슴 아픈 시대를 노래한 대중음악사의 한 페이지에 빛나는 보석으로 남았다. 

 돌아보면 이선희의 '아! 옛날이여'라는 대중 가사처럼 그때 그 시절이 콧등 찡하게 그리워진다. 인터넷을 뒤졌다. 전국에는 아직도 '청자다방' 간판을 단 곳이 여러 곳 있었다. 울산 청자다방도 복원됐으면 하는 기대를 한다. 

시계탑 사거리로 나가는 길목. 2013년. 작가 제공

 마무리 그리고 작은 기대

울산 중구도 시계탑 일대를 중심으로 '울산의 인사동'이라고 별명을 붙인 종갓집 문화의 거리를 만들었다. 구 울산 초등에서 시작해 시계탑 사거리를 지나서 울산교까지 이어지는 문화의 거리, 이 골목을 걷다가 무작정 들어가 커피 한 잔 마실 수 있는 그런 다방이 없다는 것은 심히 유감이다.

 문화 인류학자들은 인간이 절망하지 않고 사는 이유가 과거의 아릿한 추억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우리는 그 추억 속에 청자다방을 간직하고 있다.

정은영 울산불교문인협회장
정은영 울산불교문인협회장

 울산 원도심, 문화의 거리에는 지금 커피 전문점들이 무수하다. 그중에 다방은 눈을 닦고 봐도 없다. 문화의 거리가 각박한 세상을 살면서 잃어버린,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를 떠 올리는, 추억과 현대가 조화를 이루는 거리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러려면 첫 번째가 다방이 있어야 하는데…. 

 정 이것도 저것도 안 된다면 '이 거리 어디 메에 청자다방이 있었지.' 하는 생각이라도 떠올릴 수 있게 예쁜 위치 석이라도 설치되기를 두 손 모은다. 서울에는 곳곳마다 과거 흔적을 알 수 있는 표지석들이 있다. 울산시도 그렇게 했으면 한다.   정은영 불교문인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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