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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 ⓒ장세련
삽화. ⓒ장세련

서찰을 다 읽고 난 상왕의 얼굴엔 화기가 비쳤다. 마치 깜깜한 어둠 속에서 호롱 불빛을 발견한 사람 같았다.

 "이것이 정녕 대군께서 보낸 것이란 말인가?"

 상왕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재차 물었다.

 "대군께선 잠시도 전하를 잊지 않고 계십니다. 전하께서 참고 견디시면 반드시 밝은 날이 올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 대군께서 순흥에서 일을 도모하고 계신다 하니 내가 이 수모를 견디어야 하지 않겠소. 대군만 믿고 있겠다고 가서 이르시오. 이곳에서 순흥까지 거리가 얼마나 되오?"

 "네, 전하. 큰 령을 하나 넘으면 바로 순흥으로 팔십 리 거리입니다. 대군께서 수일 내로 전하를 뵈러 오실 것입니다."   

 "오, 내가 숨이 막혀 죽을 것 같더니 이제 살 것 같도다. 가서 대군께 이르시오. 나는 잘 견디고 있다고 말이오."

 "네, 전하 분부대로 거행하겠습니다."

 이선달은 상왕에게 배례하고 자리에서 물러 나왔다.

 서강과 동강이 영월에서 만나면 남한강이 되어 충청도 쪽으로 흐른다. 주변의 산들이 모두 바위 절벽으로 이루어져 풍광이 뛰어났다. 매일 아침 물안개가 강과 촌락을 살짝 가려놓으면 인간들이 살지 않는 선계와 같다. 영월에서 30리쯤 아래로 내려오면 우측에 태화산이라는 높은 산이 있다. 다른 곳과는 다르게 암벽이 적어 농사지을 수 있는 땅이 제법 있었다. 그러다 보니 강변을 따라 제법 많은 집이 촌락을 이루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농사를 짓는 외에도 겨울에는 태화산의 산짐승을 잡아 식량으로 보탰고, 여름이면 마을 아래 남한강에서 온갖 물고기를 잡아먹었다.

 그런데 남한강 건너편은 수십 길 높이의 바위가 병풍처럼 둘려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이 바위 절벽을 뼝대바우라고 불렀다. 뼝대바우가 시작되는 지점은 강 건너편에서 남한강과 합류하는 옥동천이 시작되는 곳이었다. 옥동천을 거슬러 올라가면 고치령과 마구령으로 넘어갈 수 있었다.

 옥동천엔 한 아름은 넘는 굵직한 호박돌이 지천으로 널려 있었다. 그것들이 남한강까지 굴러 내려갔다. 각동 남한강 변도 옥동천에서 굴러온 굵직한 호박돌이 십 리는 펼쳐져 있었다.

 십여 년 전에 각동에 사는 임영복이란 청년이 강변 돌밭에서 이상한 호박돌 하나를 발견했다. 둥그스름한 돌 안에 금강산을 옮겨놓은 듯한 그림이 나타나 있었다. 돌이 닳아 자연스럽게 나타난 문양인데 환쟁이가 그려놓은 듯했다. 겹으로 나타나 있는 바위산 중턱에는 구름이 살짝 걸려있고 그 위에 둥근 보름달이 떠 있었다. 보름달이 동그랗게 도드라져 있는 데다 물에 닳아서 광채가 났다.

 임영복은 이 기막힌 호박들을 메고 영월 군수를 찾아갔다. 영월 군수는 커다란 돌덩이를 안고 관아 문을 들어오는 꾀죄죄한 청년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임영복이 들고 있던 호박돌을 마당에 쾅 하고 내려놓자 관아기둥이 흔들렸다.  

 돌을 바닥에 내려놓은 청년은 힘든 표정 하나 없이 손바닥을 툭툭 털었다. 영월 군수는 청년을 유심히 살펴보았는데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몸집이 우람한 것도 아니고 팔뚝이 힘깨나 쓰게 생긴 것도 아니었다.

 "어허. 이 무슨 행패냐. 집이 무너질 뻔하지 않았느냐. 그 돌은 어디에 쓰는 물건인고?"

 "사또 나리. 이 돌을 사또 나리께 바치려고 각동에서 가져왔습니다. 한 번 살펴보십시오."

 영월 군수는 각동에서부터 돌을 가져왔다는 말에 더 놀랐다. 마당으로 내려가 가져온 돌을 살펴보았다. 돌을 살펴보던 군수는 점점 입을 크게 벌렸다.

 "어허. 이건 금강만월도가 아니냐? 누가 돌에다 이런 그림을 그려 넣었느냐?"

 "사또 나리. 이 그림은 사람이 그린 것이 아니고 저절로 돌 안에 그려져 있던 것입니다. 소인이 보기에도 너무 신기해 보여 사또 나리께 가져온 것입니다."

 "허허, 기특한지고. 이걸 이왕 가져온 김에 저 앞쪽에다 보기 좋게 세워 놓아라."

 "예, 사또 나리."

 임영복은 사또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바닥의 돌을 번쩍 들어 올렸다. 가뿐한 걸음으로 관아 마루에서 잘 보이는 마당 가에 반듯하게 세워놓았다. 사또는 물론이고 둘러서 있던 아전들도 임영복의 힘에 입이 쩍 벌어졌다.

 "천하장사로다. 그대는 어디에 사는 누구인고?"

 "소인은 각동에 사는 임영복이라고 합니다."

 "부친의 함자는 어떻게 되는고?"

 "그게 없습니다."

 "없다니? 부친이 안 계신다는 것이냐? 함자가 없다는 것이냐?"

 "둘 다입니다. 제 친부는 저의 얼굴도 보지 못하고 돌아가셨고 지금 새 아버지는 함자가 없습니다."

 "함자가 없다니 어찌 그런 일이 있단 말이냐?"

 "그냥 사람들이 이름 대신 소백정이라고 부르는데 저도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어 알 수가 없습니다."

 "허허, 이런 고약한 일이 있나. 이런 천하장사를 산골에 처박아 놓다니. 이제부터 너는 나라를 위해 네 힘을 쓰도록 해라."

 "사또께서 시키는 일이라면 뭐든지 합죠."

 "암. 그래야지. 저걸 가져오느라 힘을 좀 썼을 테니 우선 요기부터 해라." 김태환 작가

 (월·수·금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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