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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진 아동문학가
이수진 아동문학가

인상적인 표지가 뉴베리 대상을 받았다는 표시보다 눈에 띈다. 푸른빛의 기시감이 짙은 표지 속에 반쯤 온기가 도는 얼굴은 미묘하게 강한 인상을 준다. 인간에게 익숙한 이성과 감성의 구분일까? 그저 궁금증을 갖고 책장을 펼치기엔 하드커버의 양장본이 제법 두께가 있다. 그럼에도 주인공 페트라의 모험에 푹 빠져 영화를 보는 것 같다. 장면 하나하나가 머릿속에 그려지는 구성인데다 인물들의 디테일한 감정선까지 묘사하며 전율을 느낄만한 책이다. 실로 오랜만에 두껍게 만나본 SF 명작이다. 아쉬운 점이라면 번역 탓인지 매끄럽지 못한 글 흐름이 속도감 있는 글 읽기를 자주 방해한다. 

 책 '마지막 이야기 전달자'는 원작 'Last Cuentista', 스페인어로 마지막 이야기꾼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진부하다고 느끼는 "옛날 옛적에…"로 시작하는 그 문장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게 한다. 2061년 7월 28일 주인공 페트라는 사랑하는 할머니를 지구에 남겨두고 새로운 행성 세이건에 정착할 목적으로 우주선에 탑승하게 된다. 할머니로부터 쿠엔토(이야기)를 들으며 자란 페트라는 할머니처럼 이야기 전달자가 되어 사람들에게 재밌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 한다. 하지만 페트라의 가족을 포함한 선택을 받은 소수의 몇 명은 멸망을 앞둔 지구를 떠나 새로운 행성으로 향하는 우주선에 오른다. 

 380년이라는 긴 수면의 시간을 거쳐 도착한 미래는 기대한 것도, 바라던 것도 아니다. 2442년에 깨어난 페트라는 '콜렉티브'라는 집단에 의해 강제로 기억이 삭제되었음을 알게 된다. 인간의 뇌에 있는 기억들을 강제로 지우고 새로운 지식을 입력한 것이다. 그 집단은 인간의 지식을 통제하고 자신들이 가진 지식을 나눠주어 평등한 세상을 만들고 인류의 죄를 끝낼 수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페트라만 지구의 기억을 갖게 된다. 위험을 감지한 페트라는 이들이 원하는 행동과 말을 하되, 우주선 안 어딘가에 잠들어 있을 가족을 찾아 탈출하겠다는 결심을 한다.

'마지막 이야기 전달자'. 작가 제공
'마지막 이야기 전달자'. 작가 제공

 "이야기가 없는 세상은 죽은 거나 마찬가지야."

 두렵고 힘든 상황이 반복되지만 그때마다 할머니가 들려준 이야기들을 떠올리며 페트라는 용기를 갖게 된다. 때때로 잊고 산다는 것, 걱정 없이 산다는 것이 행복할 것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평등한 세상을 꿈꾸고 지배하려는 '콜렉티브'를 보며 진정한 인간의 의미, 무엇이 우리를 인간이게 하는지 생각하게 한다. 책 '마지막 이야기 전달자'는 자기 자신을 잃지 않고 꿈을 잃지 않은 채 다른 아이들에게 쿠엔토를 들려주는 패트라의 이야기이며, 삭제된 기억 저 아래 살아있는 지구의 이야기다. 위험을 감수하지 않으면 바다를 건널 수 없듯이….

 누군가 목숨을 잃거나 사라져도 신경 안정제가 든 토닉을 마시며 아무 일도 없는 듯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사회에서 주인공 페트라는 '사랑'과 '연민'이라는 감정을 가지고 가족을 찾는 마음을 잃지 않는다. 또한 페트라와 같은 방에 있는 제타 대원들에게까지 할머니에게서 들었던 마법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며 감정이 없는 이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한다. 이곳에선 절대 금지된 감정과 생각을 담아 "옛날 옛적에…"로 시작하는 이야기를 동료들에게 들려준다. 비로소 이야기 전달자가 된 것이다. 이윽고 페트라는 탈출을 감행하면서 새 삶을 향해 한발 내디딘다. 그는 지구에 남겨졌던 할머니가 전해 준 이야기를 동력 삼아 살아갈 힘을 얻는다. 그리고 페트라는 낯선 행성에서 최초의 도착자를 발견하면서 그들의 이야기는 계속 이어진다. 

 모든 이야기가 해피엔딩으로 끝나지는 않는다. 이 책 '마지막 이야기 전달자' 역시 마지막 희망을 그리며 끝을 맺는다. 아마 그들에겐 다시 인간 본성을 복원하는 긴 시간이 될지 모르겠다. 다르기 때문에 인간은 아름다운 것이며, 그 다름을 배척하지 않고 인정하고 포옹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평등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는 시간이 그리 길지 않기를 바라본다. 여전히 전쟁은 일어나고 사건과 사고는 끊이지 않지만 그런 미래를 그리고 싶지는 않다. 특히 뜨거운 김이 오르는 고구마에 시골에서 보내온 김장 김치를 크게 찢어서 먹는 날에는 더욱 그렇다. 아주 오래전 할머니의 엄마의 엄마의…, 엄마에게서 시작된 김치를 먹으며. 이수진 아동문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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