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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수 전 대구지방보훈청장·시인
최용수 전 대구지방보훈청장·시인

우리는 다양한 맛을 즐기며 살고 있다. 음식은 식성과 사회 여건의 변화에 따라 단순히 배를 채우는 양(量)적인 면에서 맛과 건강 등 질(質)적인 면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 

 지금 우리는 맛에 열광하며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간에는 맛을 찾아 "3 무리" 한다는 우스갯말이 있는데 맛이 있다면 아무리 멀어도, 아무리 비싸도, 아무리 기다려도 감수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라고 한다. 요즘 여러 매체에서 특별한 음식과 독특한 맛을 소재로 다양한 프로그램을 선보이고 시청자가 많다는 것이 이를 방증한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즐기는 맛에는 외국에서 전해져온 음식 맛과 전통적인 우리의 음식 맛, 그리고 둘을 아울러 재개발한 새로운 맛 등이 있다. 사람들은 각자의 취향에 따라 구미에 맞는 음식 맛을 즐기는 것이다. 우리는 세계인이 감탄하는 맛을 예부터 가지고 있었다. K-팝과 더불어 K-푸드(food) 인기도 대단히 높다.

 김치는 이미 세계적인 한국 음식이 되었고, 미국에서는 매년 11월 22일을 김치의 날로 지정하였다 한다. 또한 구글(Google)의 세계 최고 검색어가 비빔밥이라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세계적인 맛을 마음껏 즐길 수 있다는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고 긍지가 느껴지기도 한다.

 맛을 인간의 삶 그 자체에 비유하기도 한다. 살면서 "단맛 쓴맛 다 보았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라던가 "죽을 맛이다" 또는 "살맛 난다" 등등 인간 생활과 상관성을 가진 말들이 수없이 많다.

 맛은 혀끝을 적시는 미각으로 즐거움을 안겨 주기도 하지만, 추억과 짙은 향수가 쓰려 있어 가슴을 따뜻하게 데워주기도 한다. 곰삭은 홍어를 즐기고 어머니가 끓여주던 청국장을 잊지 못하는 것도 그러한 연유가 아닐까 싶다. 

 개인적이고 예스러운 이야기지만 나에게도 잊지 못하는 추억 어린 3가지 맛이 있는데 여기에 조금 부끄럽기도 한 그 이야기를 용감하게 털어놓고자 한다. 

 첫 번째는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때쯤으로 생각되는데, 그 시절에는 배를 곯거나 보리밥 또는 나물밥으로 연명하는 가정이 많았고 우리 집도 예외가 아니었다. 학교에서 돌아와 부엌에 들어가 보니 허연 쌀밥 한 바가지가 살강에 앉혀 있기에 왠 떡인가 싶어 허겁지겁 모두 먹어 치워버렸다. 알고 보니 어머니가 마을 부잣집의 장례 일을 도와주고 아버지 드리려고 얻어온 밥이었다. 어머니로부터 먹은 밥보다 꾸지람을 더 많이 얻어먹은 것은 당연지사였지만 지금도 그때의 밥맛이 기억 속에 남아 있다.   

 두 번째는 아마 초등학교 5∼6학년 때 겨울인 것 같은데 추위에 얼굴이 홍시가 되어 집에 돌아오니 아버지가 삶은 돼지고기 한 바가지를 내주시기에 나는 태어나 처음 먹어보는 돼지고기 맛에 걸신들린 듯 집어삼켜 버렸다. 그날 밤 무서운 변소 길을 몇 번이나 다닌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뒤에 알고 보니 구정 물통에 빠져 죽은 돼지 새끼를 얻어와 삶아준 것이었다. 그때의 맛을 잊지 못한 탓인지 지금도 돼지 수육을 즐겨 먹고 있다. 

 세 번째는 중학교 2학년 때인데 설을 며칠 앞둔 어느 날, 아버지께서 학교 파한 뒤 곧장 반장 집으로 오라고 하시기에 저녁나절에 찾아갔더니 나를 장독대 뒤에 데려가 비료 포대종이를 주섬주섬 펼쳐 천엽 몇 점과 간 한 덩이를 내놓으며 어서 먹으라 하였다. 그것 역시 먹어보지 못한 음식이라 보통 맛이 아니었다. 돌이켜 보면 아버지는 먼 길을 걸어서 통학하는 내가 애처로워 먹지 않고 보양식으로 먹였을 것이다. 지금 아버지의 따스한 사랑의 맛이 아려온다. 

 

긍정적인 밥

함민복

 

시(詩) 한 편에 삼만 원이면

너무 박하다 싶다가도

쌀이 두 말인데 생각하면

금방 마음이 따뜻한 밥이 되네

 

시집 한 권에 삼천 원이면

든 공에 비해 헐하다 싶다가도

국밥이 한 그릇인데

내 시집이 국밥 한 그릇만큼

사람들 가슴을 따뜻하게 덮여줄 수 있을까

생각하면 아직 멀기만 하네

 

시집이 한 권 팔리면

내게 삼백 원이 돌아온다

박리다 싶다가도

굵은 소금이 한 됫박인데 생각하면

푸른 바다처럼 상할 마음 하나 없네 

 

 이 시는 25여 년 전 발표 되었는데 시인은 시 한 편을 쓰기 위하여 심혈을 기울였을 것이다. 공들인 노력에 비하면 대가가 미흡하다고 생각하다가 쌀 한 말, 국밥 한 그릇, 소금 한 됫박의 소중함을 인식하고 가치를 인정한다. 오히려 자신의 시가 국밥 한 그릇에 비해 사림의 가슴을 따뜻하게 데워주기에는 부족하다며 깊이 자성하고 있다. 자고자대(自高自大) 않고 상대방을 존중하며 겸허와 소박에 눈높이를 맞춘 긍정적인 밥이야말로 가장 맛있는 성찬이 아닐까. 

 시인의 심전(心田)에는 한 떨기 해바라기꽃이 피어있을 것 같다. 땡볕에 익혀온 새까만 씨알이 아깝다 하다가도 가난한 새들에게 모두 내어주는 베풂의 삶이 어려있다. 바다처럼 상하지 않는 사람의 맛이 진한 육수처럼 은근하게 우러나고 함께 나누는 쟁반 같은 포용이 전편(全篇)에 얼비쳐 있다.

 누가 뭐래도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것은 살맛이 아닐까 싶다. 살맛 나는 세상이란 노력한 만큼 거둘 수 있고, 모자람의 주름살을 펴주며 배려하고 서로 나누는 풍토가 아닐까. 맛있는 음식은 혼자가 아닌 함께 나눌 때 더욱 맛이 날 것이다. 앞에서 시 '긍정적인 밥'을 소개한 것도 살맛 나는 세상의 일면을 찾아보려는 의도이다. 

 이제 청룡의 새해가 밝아왔다. 청룡은 사방(四方) 중 태양이 떠오르는 동쪽을 의미한다. 올 청룡의 해에는 그늘진 곳에 빛이 깃들고 냉방에는 온기가 돌기를 기망(祈望)한다. 성대한 말 잔치보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조촐한 밥상 앞에서 사는 맛을 즐길 수 있게 되길 바란다.

※ 함민복 시인은 1962년 충북 청주에서 태어나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1988년 세계의 문학으로 데뷔했다. 주요 시집으로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당신 생각을 켜놓은 채 잠이 들었다' 등이 있다. 최용수 전 대구지방보훈청장·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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