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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 ⓒ장세련
삽화. ⓒ장세련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신은 전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소신이 주상전하를 잘 받들지 못한 죄 죽어 마땅한 줄 압니다."

 한 대감은 이마가 땅에 닿도록 엎드렸다. 그의 목소리는 울음소리에 가까웠다.

 "한 대감 진정하시오. 그대는 정녕 나의 충신이오. 후대사람들이 나를 욕하는 대신 한 대감을 욕하게 될 것이오. 조선 최고의 살수인 짐이 저지른 죄를 한 대감이 짊어지고 갈 것이오. 지금도 보시오. 금성대군과 어린 상왕을 죽여야 하는 것은 바로 나의 뜻이오. 나는 그들이 살아 있는 동안 숨을 쉬고 살 수가 없소. 하루라도 빨리 그들의 숨통을 끊어놓도록 하시오. 그래도 후대 사람들은 한 대감이 그들을 죽이도록 사주했다고 실록에 기록할 것이오. 어쩌면 한 대감 때문에 내가 얼마 동안은 조선 최고의 살수 자리에서 비켜나 있을 것이오."

 "성은이 망극합니다. 소인의 몸과 마음이 모두 전하의 것이니 마음대로 사용하시면 됩니다. 소인은 오로지 전하의 뜻을 따를 뿐입니다."

 "백관이 모인 자리에서 노산군과 금성대군을 참살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을 하시오. 나는 눈물을 보이며 반대를 할 것이오. 짐의 눈물도 사관들이 본대로 기록을 할 것이오. 그럴듯하지 않소? 이래도 짐을 조선 최고의 살수라고 하지 않을 거요?"

 "전하의 무거운 마음을 덜어드리지 못해 송구스럽습니다. 전하께 누가 되는 일들은 소인이 모두 짊어지고 가겠나이다."    

 "그래야지요. 조선 최고의 살수인 내가 이 자리에 앉아 있는 한, 대감께서는 대대로 부귀영화를 누릴 것이오. 하하하."

 한 대감은 고개를 슬며시 치켜들고 수양의 표정을 살펴보았다. 여러 살수들을 부려왔지만 그들의 눈에서는 볼 수 없었던 살기가 눈에서 철철 넘쳐흐르고 있었다. 한 대감은 자칭 조선최고의 살수라 자칭하는 수양의 눈빛에 심장이 바짝 얼어붙는 듯했다. 

 

9. 백두대간

 이선달이 주막집 마당에 들어서자 주모가 다람쥐처럼 쪼르르 달려 나왔다. 저번에 목간통에서 때를 밀어준 탓에 태도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실질적인 관계만 하지 않았을 뿐 자신의 몸 구석구석을 내맡겼던 사이니 더 이상 부끄러울 게 없었다. 그날 두 사람의 꼴을 보고 놀라 도망쳤던 윤미도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표정이었다. 생글생글 웃으며 정지와 평상 사이를 오갔다.

 "윤미야. 잠깐 이리와 앉아 보아라."

 이선달이 자신을 부르자 표정이 해바라기 꽃처럼 활짝 피었다. 손에 묻은 물기를 치마에 슬쩍 닦아 내고 이선달의 옆자리에 앉았다.

 "와예? 저에게 무슨 하실 말씀이 있습니까?"

 "할 말이 있으니까 부른 것이 아니냐. 너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느냐?"

 이선달의 말에 윤미의 얼굴에 빨갛게 홍조가 피었다. 감히 대답은 하지 못하고 붉어진 얼굴을 살짝 숙였다. 

 "부끄러워하지 말고 대답해 보거라."

 "어떻게 생각하기는요. 그냥 멋있는 아제라고 생각하지예."

 "그게 전부냐?"

 "그럼요."

 "혹시 나를 따라가고 싶은 생각은 없느냐?"

 윤미는 어쩔 줄 몰라 쩔쩔맸다. 치맛말기만 말았다 폈다 하며 차마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때 마침 정지에 있던 주모가 마당으로 나왔다.

 "마침 잘 나오셨소. 윤미를 내가 데려갔으면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시오?"

 주모도 깜짝 놀라 이선달과 윤미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윤미가 이선달을 좋아하는 눈치는 알았지만, 이선달의 입에서 이런 말이 쉽게 나오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자기가 했던 말은 어디까지나 농담이었다. 

 막상 사위를 본다고 해도 걸리는 게 한둘이 아니었다. 우선 살림을 차릴 집이 문제였다. 이선달이 제법 재물은 가지고 있는 것 같은데 떠도는 몸이었다. 어디에 둥지를 틀고 살림을 차려야 하는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두 번째는 윤미를 보내고 나면 홀로 남게 되는 자신이 문제였다. 윤미가 손을 보태지 않으면 주막 일을 꾸려가는 게 불가했다. 주모의 생각으로는 주막에 방을 덧대어 만들고 이선달이 들어와 살았으면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만 된다면 일손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고 손님들도 실없이 집적거리지 않아 좋을 것 같았다. 나중에 손자를 낳으면 그야말로 사람 사는 재미가 넘칠 것 같았다.  (월·수·금 게재됩니다) 김태환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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