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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진 아동문학가
이수진 아동문학가

붉은 표지와 제목, '사랑인 줄 알았는데 부정맥(실버 센류 모음집)'을 처음 접하고 의학 도서인 줄 알았다. 

 작고 얇은 책 속에 나이 듦에 대한 노인의 일상과 유머가 재치 있는 그림과 시로 함께 들어있다. 실버(silver) 센류(川柳)라는 용어가 다소 낯선 시집이다. 

 일본의 정형시 중 하나인 센류는 5-7-5의 총 17개의 음으로 된 짧은 시로 풍자나 익살이 특색이다. 여기에 일본식 영어 실버가 더해졌다. 머리가 백발이 되는 것에서 따온 단어로, 일본 철도의 노약자석인 '실버 시트'가 그 어원이다. 

 2001년부터 매해 열리는 센류 공모전 중 88편을 추려 담은 책이다. 큼직한 글씨와 삽화까지 읽기도 재밌고 두고두고 보기도 좋은 책이다. 짧은 글인 만큼 번역이 중요한 데 얼마나 잘 살렸는지 원문과 비교할 수는 없지만 의미는 알 것 같다.

 나이가 들면서 늘어나는 실수, 저장되지 않는 기억, 귀도 안 들리고 보이지도 않는 노년의 삶의 다양한 풍경을 담고 있다. 재치가 넘치는 다양한 시가 있지만, 표제작인 '사랑인 줄 알았는데 부정맥'이 단연 나에게는 으뜸이다. 

 노년의 삶을 다룬 시이긴 하지만 내 일상과도 조금은 닮아 있는 시들, 어쩌면 곧 닮을 시들이라 몰입하게 된다. 후루룩 금방 읽고 난 뒤에 남는 깊은 여운. 작가님들의 나이를 다시 한번 살펴보게 된다.

 페이지마다 웃음이 터져 나오는데, 웃음은 얕고 쓸쓸함이 깊다. 문장 하나하나에 박장대소하면서도 이 모든 페이지를 다 이해하고 있는 나 자신이 웃기면서도 쓸쓸하다. 하지만 나이 듦을 부정적으로 보지 않고 풍자와 은유를 담아 삶을 이야기하는 표현이 멋지고 매력적이다. 

책 '사랑인 줄 알았는데 부정맥(실버 센류 모음집)' 표지
책 '사랑인 줄 알았는데 부정맥(실버 센류 모음집)' 표지

 눈이 침침해 이제 책 보기가 수월치 않다는 주변 어르신들께 가볍게 넘겨 보라고 건넬 생각인데, 혹시 너무 무겁게 다가서지나 않을까 망설여진다. 이 역시 나의 기우이려나.

 '초고령 사회 일본의 축소판이자 메시지 집'이라는 편집후기가 남의 나라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동시에 우리의 모습이기도 한 '사랑인 줄 알았는데 부정맥'은 어김없이 나에게도 올 시간들을 어느 정도 예측하게 하는 책이다. 책은 얇고 글자 크기도 커서 빨리 읽는다면 15분, 오래 읽는다면 약 40분 정도 걸릴 내용이다. 그럼에도 나는 인상 깊었던 구절들은 기록해놓고 두어 번 정도 다시 읽어봤다.

 그리고 생각한다. 편하고 적당히 그리고 허술하게, 여유 있게 세월에 물들어 가야겠다. 이제, 촘촘하게 살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었던 시기를 지나 내 안의 평화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고 있는 중이다.

 마지막 책장을 덮자 자꾸만 나를 뒤돌아보게 하는 문장들이 따라온다.

 "종이랑 펜 찾는 사이에 쓸 말 까먹네"

 "연명 치료 필요 없다 써놓고 매일 병원 다닌다"

 "만보기 숫자 절반 이상이 물건 찾기"

 "경치보다 화장실이 신경 쓰이는 관광지"

 "이 나이쯤 되면 재채기 한 번에도 목숨을 건다"

이수진 아동문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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