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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 ⓒ왕생이
삽화. ⓒ왕생이

 

뒷말이지만 설운도라는 이름을 지을 때 운도는 지어놓았는데 성을 붙이는 과정에서 오래 고민했다고 한다. 최운도, 박운도, 정운도, 김운도 라고 해도 뭔가 2% 부족했다. 그래서 작곡가 선생이 큰맘 먹고 설운도라고 지었다고 한다. 이름 덕분이었을까, 그에게 하루아침에 천재일우의 기회가 왔다. 

 바로 KBS한국방송이 주관방송사로 남북 이산가족 찾기 행사를 개최했다. 설운도는 절호의 기회에 남북 이산가족의 아픔을 담은 곡 '잃어버린 30년'을 불렀다. 방송현장은 눈물바다가 됐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그리웠던 삼십 년 세월

 의지할 곳 없는 이 몸/ 서러워하며/ 그 얼마나~ 울~었던가요 

 우리 형제 이제라도/ 다시 만나~서/ 못다 한 정 나누는데 

 어머님~~ 아버님 그 어디에 계십니까/ 목메이게 불러봅니다 

 

 “니가 누고, 숙이 아이가"

 “오마니 내가 숙이라요."

 땅을 치며 통곡하는 이산가족들 사이를 비집고 가슴을 파고드는 설운도의 '잃어버린 30년'은 빅 히트곡이 되었다.

 설운도는 이 노래 한 곡으로 대번에 벼락스타가 됐다. 그는 자고 나니 세상이 바뀌어 있었다는 말이 이런 것이구나 하고 실감했을 것이다. 보통사람들은 이런 운을 만나기가 쉽지 않다. 설운도는 타고난 노래 실력만큼이나 운이 따른 사람인 것 같다. 그 뒤부터 울산 노래자랑 콩쿠르 하면 설운도 이야기가 전설로 둔갑했다. 황금다방도 덩달아 떴다.

 '남북 이산가족 찾기' TV 방영 당시 메인 곡으로 선정된 '잃어버린 30년'은 경기도 파주 임진각에 '망향의 노래비'로 세워져 현재까지도 북한이 고향인 망향 인들의 기억 속에 아릿한 추억 속에 자리 잡고 있다. '잃어버린 30년'은 역대 최단기간 히트곡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됐다.

 

 개천서  용났던 시절 노력하는 청춘에 희망의 도시

7080세대들이 청춘이던 때는 우스갯소리로 물이 맑아서였던지 강이 아닌 개천에서도 용이 자주 났던 시절이었다. 설운도 역시 이 노래자랑에 출전했을 때만 해도 대한민국 최고 가수가 되리라고는 누구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설운도뿐만 아니라 7080세대들은 정부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더불어 울산공단을 시작으로 전국에 공단이 조성되면서 희망의 꿈을 꾸는 기회를 얻었다. 열심히 살았던 사람들 상당수는 실제 경제인으로 큰 성공을 이루었다. 그 시절 비록 기름 묻은 작업복을 입고 있었지만, 포부가 있었고 희망찬 미래를 꿈꾸었다. '기름장(쟁)이'라는 말이 자랑스럽게 들렸던 도시 울산은 노력하는 청춘들에게는 희망의 도시였다. 그때 기름쟁이들은 현재 효문공단이나 온산공단 등 울산지역 여러 공단에서 기업을 크게 일군 사람도 더러 있었다.

 이들은 지금도 다방 마담 하면 어느 다방 마담이 예뻤다는 정도는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줄줄이 엮어냈다. 그들도 시간이 날 때는 지난날을 추억하며 가끔 다방 이야기를 양념처럼 내놓는다고 한다. 

 

아직도 수십 년째 영업하고 있는 경남은행 뒤 고궁식당(왼쪽)과 지금은 흔적이 사라진 찌개 등으로 유명한 풍전식당과 구미식당. 작가제공
아직도 수십 년째 영업하고 있는 경남은행 뒤 고궁식당(왼쪽)과 지금은 흔적이 사라진 찌개 등으로 유명한 풍전식당과 구미식당. 작가제공

 

출근길 만난 레지 아가씨 커피한잔 주던 낭만도

학성공원 앞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출근했던 한 친구는 “아침에 작업복을 입고 출근하는 대한민국 유일한 도시가 울산이었다."라고 회고했다. 시내버스를 기다리다 상가점포에 물 배달 가는 반구동 로터리 물레방아다방 단골 레지 아가씨를 만날 때는 좀 당황했지만, 이 아가씨가 체면 없이 “오빠야! 출근하나, 반갑다, 커피 한잔 마시고 가라" 하면서 오토바이를 세워놓고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태연하게 커피 한잔 따라주던 낭만도 있었다고 한다.  

 최근 그는 1970년대와 80년대 주말마다 시계탑 사거리 일대 음악다방에 출근 도장을 찍던 필자를 보고는  “너는 요즘 음악다방이 없어져서 오데 가노" 하고 실없는 농담을 했다.  

 황금다방 주변은 양복점들이 많아서 울산 신사들이 즐겨 찾았고 또한 자연스레 맛집들이 주변에 제법 있었다. 아직도 수십 년째 영업하고 있는 경남은행 뒤 고궁식당은 점잖은 분들이 찾아오는 식사 장소로 여전히 건재하다. 

 아쉬운 것은 찌개 등으로 유명한 풍전식당과 구미식당이 있었는데 지금은 흔적이 없다. 이들 식당은 출입구가 같아서 같은 골목으로 들어가서 식당 문 앞에 가야 어느 식당 손님인지 나뉘었다. 이 두 집은 자타가 공인하는 그 시절 울산 최고 맛집이었다. 예약 문화가 없던 때라서 식당 문 앞은 늘 긴 줄을 서야 했다. 황금다방 손님들도 자주 이 식당을 이용했다. 찬 바람이 부는 날 뜨끈한 국물 생각이 나면 이 식당이 제격이었다. 

 이들 식당은 찌개에서 회 밥으로 메뉴를 바꾸어서 수년 전까지 영업했는데 구미식당은 문을 닫고 주차장이 됐다. 풍전식당은 '금옥만당'이라는 중국 주점으로 간판을 바꾸었다.

 

정은영 울산불교문인협회장
정은영 울산불교문인협회장

 

주변 상인들 문닫은지 20년 정도 됐을 거라 짐작

황금다방이 언제 문을 닫았는지 알 수 없지만, 주변 상인들은 대략 20년 정도 됐을 거라고 짐작했다. 그러고 보니 세월은 참 많이 흘렀다. 함께 소주를 마셨고 다방에서 커피를 마셨던 친구들도 주말이면 친구 자녀들의 결혼식 참석으로 주머니 사정이 여유가 없다고 하소연이다. 모두 옛날 청춘 시절 우리 아버지 어머니처럼 나이를 먹었다. 유명 양복점에서 맞춘 신사복 정장에 캉캉 백구두를 신고 폼을 잡던 그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돌아보면 달려가고픈 아련한 추억이다.

 

 내가 놀던 정든 시골길/ 소달구지 덜컹대던 길

 시냇물이 흘러내리던/ 시골길은 마음의 고향

 

 가수 겸 방송진행자인 임성훈이 1977년 불러서 히트했던 '시골길'의 한 대목이다. 대단한 인기를 몰고 다녔던 대중가요다. 이 노래는 각종 경기 때 응원가로 많이 불렀고 대학축제에서도 단골 레퍼토리로 등장했다. 황금다방 가요콩쿠르에서 이 노래를 불렀던 친구가 음정 박자 불안으로 예선 탈락했다는 소문이 나면서 우리는 이 친구를 만나면 은근히 놀리는 방법으로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시골길'을 불렀다.

로큰롤 황제 엘비스 프레슬리 스타일 유행

1970년대와 80년대 아가씨들은 무릎 위 30㎝ 미니스커트나 12인치 나팔바지를 입었고 8㎝ 굽의 하이힐을 신었다. 이에 반응하듯 총각들은 귀를 덮는 장발에 바지 무릎과 아랫단 실이 흥건하게 풀린 청바지를 입었다. 좀 더 잘나갔던 청춘들은 몸에 꽉 끼는 가죽점퍼를 걸쳤고 목에는 총천연색 스카프를 했다. 이런 패션이 유행을 이끈 음악다방 DJ들의 차림이었다. 어른들은 말세라며 인상을 찌푸렸지만, 그것이 당시로써는 로큰롤 황제 엘비스 프레슬리 스타일이었다. 

 청춘들은 그 차림에 끔뻑 죽었다. 로크라는 새로운 음악문화의 상징이 된 히피 바람은 정신 줄을 놓은 것처럼 보였을지라도 그들이 꾸는 꿈은 파란 하늘처럼 맑고 순수했다. 돌아보면 열심히 그 시대를 살아온 청춘들의 풋풋했던 순수함이 지금 세상을 놀라게 하는 K-팝 열풍을 몰고 온 밑천이 아닐까. 아니면 잘 사는 대한민국을 만들어낸 보이지 않는 힘이 됐다고 한다면 억지일까?

 최근 어떤 사회 인문학 연구소에서 58년생 개띠들에 대한 사회적 평가를 시작했다고 한다. 이들은 7080세대 중심 인적자원이다. 인구수로 보면 60년생보다 적고 59년생보다도 적은 수다. 그런데 유독 58 개띠들이 돋보이는 이유는 뭘까. 그것을 연구한다고 하니 재미있는 결과가 나올 것 같다. 

 더 바란다면 연구만 할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을 부강하게 만든 이들은 자식 키우고, 부모 모시느라 정작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해놓은 것이 없는, 직장을 퇴직하는 순간 빈털터리가 돼버린 그들에게 정부가 배려차원에서라도 쉴 자리를 만들어 주었으면 한다. 

 그들의 젊은 날 추억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도심 어디엔가 다방이 한곳쯤 있다면 늘 추억 이야기로 문지방이 반질반질하지 않을까 한다. 경로우대 차원에서 마을마다 경로당을 짓듯이 도시 골목에도 희미한 추억다방이 생겨났으면 싶다. 

40년전 대학시절 일일 찻집때 생각나

지난 3월 아지랑이 피는 어느 날 오후였다. 모처럼 시계탑 사거리에 나갔다가 2년 전 직장에서 퇴직한 친구를 만났다. 그가 내게 물었다. “요즘 뭐하냐"고. 답 대신 다시 내가 물었다. “요즘 너는 뭘 하느냐?"고, 그와 나는 동시에 우물쭈물했다. 둘 다 말에 자신감이 사라졌다. 그는 퇴직 후에도 매일 아침 정해진 시간에 출근하듯 열심히 산을 오르고 있는데 점차 싫증이 나서 무엇인가를 해야 하지 않나 심각하게 고민 중이라고 했다.

 나는 그에게 지금 하는 운동이나 하며 돈 안 까먹고 사는 것이 결국은 돈 버는 것이라고 화두처럼 한마디를 툭 던지고는 돌아섰다.

 그와 헤어져서 황금다방이 있던 건물로 다시 들어서다가 순간 뒤를 돌아봤다. 멀어져가는 그의 정수리가 햇볕에 반짝거렸다. 40년 전 대학 시절, 황금다방에서 일일 찻집을 열었을 때 커피잔을 나르던 그를 떠 올렸다. 그때 그는 머리카락이 한 올도 빠지지 않았었다. 정은영 울산불교문인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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