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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 ⓒ장세련
삽화. ⓒ장세련

노각수가 천천히 몸을 틀어 이선달을 바라보았다. 이선달은 노각수의 얼굴을 바라보고 깜짝 놀랐다. 전에 보았던 노각수의 얼굴이 아니었다.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올 것 같지 않았던 살기 넘치는 모습은 온데간데 없었다. 두 눈이 붉게 충혈된 것으로 보아 눈물을 흘리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네놈이 죽을 때가 되긴 되었나 보다. 눈물을 흘린 걸 보니 네 손에 죽은 원귀들이 달라붙었구나."

 노각수는 빙긋이 웃으며 이선달을 바라보았다. 이선달은 그런 표정이 몹시 거슬렸다. 말은 하지 않아도 원귀들에게 시달리는 것은 똑같은 입장이 아니냐고 되묻는 것 같았다.

 "내가 여기 와서 잠시 생각해 보았다. 너나 나나 우리가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느니라."

 "곧 죽을 놈이 그런 생각은 해서 뭘 하겠느냐. 어서 깨끗하게 무릎을 꿇고 목을 내놓아라. 이승균이 심심하지 않게 길동무를 해주어야 하지 않겠느냐."

 "아직 네놈들 칼끝에 목을 내놓을 몸이 아니다. 내가 누군 줄 알기나 하는 것이냐?"

 "하하하. 천하에 악독한 노각수 놈이 아니더냐."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구나. 나는 조선 제일의 살수 임영복이다. 바로 황보인 김종서 대감을 처 죽인 임영복이다. 함길도 절제사 이징옥 장군을 죽인 것도 바로 이 몸이시다."

 "참으로 악독한 놈이로구나. 그런데도 아직 사대문 안에서 갓을 쓰고 다니지는 못하는구나. 네놈을 사주하던 여우 놈은 조선 최고의 자리에 올라있는데 너는 아직도 이런 산중을 헤매고 있구나."

 이선달의 말을 들은 임영복은 움찔했다. 그것은 자신의 정곡을 찌르는 말이었다. 안 그래도 국망봉 정상에 올라 북쪽을 바라보며 하염없는 생각에 젖어 있던 참이었다. 북쪽을 내려다보면 바로 발밑에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태화산이 한눈에 들어왔다. 태화산을 감싸고 돌아가는 강줄기는 보이지 않았지만, 강 옆에 줄지어 서 있는 뼝대바우는 가늠할 수 있었다.

 예전에 커다란 돌을 짊어지고 영월 군수를 찾아갔던 일이 생각났다. 사람답게 살아보자는 다짐으로 찾아간 길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조선 최고의 살수가 되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것이 사람답게 사는 일은 아니었다. 사대문 안에서 갓을 쓰고 산다는 것이 그렇게 호락호락한 일이 아니었다.

 이번에 임무를 맡아오면서 의문스러운 게 한둘이 아니었다. 금성대군이나 노산군을 해치우려면 명령만 내리면 될 일을 왜 이렇게 복잡하게 엮어 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자신이 원산까지 갔다가 영월로 와서 받은 명령은 고작 마구령에서 장꾼 하나를 잡아 죽이라는 것이었다. 아무 장꾼이나 골라잡아 죽이는 일에 조선 최고의 살수를 보내는 이유를 헤아릴 수 없었다. 

 계유년의 정난이 끝난 지 벌써 4년이라는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그때의 공신이란 자들은 버젓이 사대문 안을 활보하고 다니는 세상이 되었다. 그런데 정작 손에 피를 묻힌 자신은 이런 산중에서 산적 노릇이나 시키다니 원통한 생각이 치밀어 오르는 것이었다. 어쩌면 갓을 쓰고 있는 자들이 드러내 놓지는 않았지만, 자신을 뒤에서 비웃고 있는 것 같았다. 마치 그 옛날 태화산 기슭의 각동에서 온 동네 사람들이 작당이나 한 듯이 자신을 무시하던 때와 똑같은 상황인 것 같았다.

 '자네도 사람답게 살게.'

 각동 돌밭에 원망스러운 말투로 자신을 질책하던 장모가 될 뻔한 여인의 목소리가 귓전에서 들리는 듯했다. 가슴이 미어져 차마 바라보지도 못했던 성영의 모습이 이제는 아슴푸레 떠올랐다. 마음만 먹는다면 한나절이면 가 닿을 곳이 각동이었다. 그러나 생각만 해도 가슴이 미어져 눈물이 봇물 터지듯 흘러내렸다. 차마 그곳에 갈 수가 없었다. 예전의 버드나무 숲은 아직도 싱싱 푸르게 각동 돌밭에서 바람에 흔들리고 있을 것이다.

 임영복은 이선달이 가까이 다가올 때까지 낌새를 채지 못하고 있었다. 갑작스레 서른 명이 넘는 인원이 눈앞에 나타났는데 전혀 당황스럽지 않았다. 사람은 누구나 다 때가 되면 떠나가야 하는 존재들이다. 그러나 아직 자신이 떠날 때가 된 것 같지는 않았다.

 "자, 가세. 이곳에서 후딱 끝낼 생각일랑 접어버리게. 이곳이 내가 죽을 자리는 아닐세."

 임영복은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이선달의 곁으로 걸어왔다. 경계태세를 취하고 있는 이선달을 그냥 지나치더니 다섯 명의 언양 무사들도 무시하듯 지나쳤다. 언양 무사들은 칼자루에 손을 대고도 이선달의 눈치를 살폈다. 명령을 내려야 칼을 뽑겠다는 신호였다. 그러는 사이 임영복은 산 사람들을 무시하듯 헤치고 올라온 길을 되돌아 내려갔다. 하는 수 없이 이선달을 비롯한 무리도 임영복의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김태환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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