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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 ⓒ장세련
삽화. ⓒ장세련

마구령에서 고치령을 거쳐 국망봉에 이르는 백두대간 길에는 난데없는 산 사람들의 왕래로 소란스러웠다. 장마철이었는데도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이선달과 임영복은 마구령의 산채에 돌아와 단둘이 독대했다. 언양 무사들을 비롯한 산 사람들은 밖에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은 차분한 목소리로 대화를 이어갔다.

 "자네도 누군가의 명령을 받고 왔겠지? 그게 누군지 말하지 않아도 되네. 그런데 한 가지 물어보겠네. 자네는 왜 그 사람을 위해서 일을 하나?"

 "그건 나에게 묻지 말고 스스로 물어보게."

 "흐흐. 그래 물어볼 것도 없지. 나는 처음에 사람답게 살아볼 거라고 이일을 시작했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사람답게 사는 일과는 전혀 동떨어진 삶이었네. 예전에 나의 새아버지는 각동에서 소를 잡는 사람이었네. 소백정이었지. 그게 무슨 큰 죄나 되는 것처럼 사람들의 멸시를 받으며 살았다네. 백정이 잡은 쇠고기는 잘도 먹으면서 말일세. 자네 부친께서도 소백정은 아니었겠지?"

 "그럴 리가 있겠나. 나의 부친은 순박한 농군이었네."

 "그것참 이상하네. 소백정의 아들이 사람 백정이 된 것은 그렇다 쳐도 선량한 농부의 아들이 왜 살수가 되었나?"

 이선달은 살수라는 말이 달갑지 않았다. 한 번도 자신이 살수라고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단지 기울어진 이 나라의 국운을 바로 잡고자 나선 일이라고 생각했다. 부귀와 권력을 거머쥐고자 함부로 살생을 일삼는 무리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생각했다. 이선달의 그런 생각을 읽은 것인지 임영복이 빙그레 웃었다.

 "자네는 참 바보이거나 교만하기 짝이 없네. 사람을 죽이는 일에는 애국이니 충성이니 하는 명분이 다 공염불일세. 그걸 모른다면 바보일세. 자네가 나와 다른 점은 다른 주인을 만났다는 것뿐일세."

 이선달도 그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었다. 자신의 재능이 대군의 눈에 띄었을 뿐이지 자신이 스스로 선택한 것은 아니었다. 임영복처럼 그런 운명이었다면 지금쯤 똑같은 길을 걷고 있을 것이다.

 "자네의 주인이라는 자도 울분에 차 세상을 읽는 지혜가 부족한 사람일세. 물론 자네에게 나를 죽이라고 명령했겠지. 생각해 보게. 자네와 나는 장기판 위의 졸에 불과하네. 졸이 졸을 잡으면 상이 졸을 잡을 걸세. 그런 다음에는 마가 상을 잡겠지. 장기판 위에 졸이 하나 없어지는 것은 판세에 큰 영향이 없네. 굳이 졸을 잡으려고 애써 자신의 수를 노출 시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일세."

 "흠, 일리가 있는 말일세. 그러면 어찌해야 하겠는가?"

 "일단은 졸이 어떻게 움직이는가? 잘 살펴보아야 상대의 의중을 꿰뚫어 볼 수 있는 게 아니겠나?"

 "나에게 앞의 수까지 내놓는 이유가 뭔가? 구차하게 목숨 보전이나 하려고 그러는 것은 아닐 테지?"

 "하하하하."

 임영복은 눈가에 눈물이 잡히도록 호탕하게 웃어댔다.

 "그렇다면 나를 베고 백만대군을 보내 이 고갯길을 지키라고 하게. 하하하."

 "…."

 "이 보잘것없는 고갯길 하나가 무에 그리 중요하다고. 하하하."

 이선달은 임영복이 이 고갯길의 중요성을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대군이 생각하고 있는 구상은 영월의 전하를 순흥부로 모신 다음 백두대간의 고갯길을 모두 막는 것이었다. 조령은 문경 군수를 포섭해 그 군사들로 지키게 하고 죽령은 풍기군수에게 고치령과 마구령은 순흥부와 산적들을 이용할 계획이었다. 일단 고갯길을 당분간 사수하고 있으면 민심이 억울하게 쫓겨난 어린 상왕에게로 기울 것이라 계산하고 있었다.

 "나를 건드리지 말고 이곳에 남겨 두게. 이 고갯길을 지켜야 한다면 내가 지켜 줄 것이네. 나를 죽여서 이곳의 상황을 고스란히 노출하는 것보다 낫지 않겠는가? 돌아가서 자네 상전에게 그렇게 제안해보게. 어떤 게 현명한 판단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시라 하게. 내 목이야 내놓으라는 순간에 어김없이 내놓도록 하겠네."

 이선달은 혼란스러웠다. 먼저 임영복이 저렇게 나오는 이유를 짐작할 수 없었다. 자신이 처음에 생각했던 것처럼 임영복의 힘을 이용할 수만 있으면 그보다 더 좋은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살수라는 것이 그렇게 하루아침에 주인의 등에 칼을 꽂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자네 토사구팽이라는 말은 들어보았는가? 사냥이 끝난 다음에는 사냥개를 잡아먹는다고 했네. 나는 이미 쓸모가 없어진 사냥개나 마찬가지일세."

 "그걸 어떻게 안단 말인가?"

 "이런 곳에 보내 장꾼들이나 터는 산적질을 시키는 걸 보면 모르겠나? 그리고 자네가 모시는 상전이 하루아침에 맥없이 나가떨어지는 것은 보고 싶지 않네. 그러니 나는 가만 내버려 두시고 볼일이나 보러 가시게. 영월에 가야 하지 않나?"

 이선달은 속는 셈 치고 임영복을 한 번 믿어보기로 했다. 언양 무사들은 산채에 남겨 두고 자신은 단독으로 마구령을 넘었다. 남대 주막거리에 당도하니 소운이 버선발로 달려 나왔다. 소운은 먼저 이선달이 다녀간 이후로 눈이 빠지도록 기다리고 있었다. 자신을 내친 사람이기는 하지만 새로 합칠 수 있다는 생각에 밤잠을 설치기 일쑤였다. 더구나 뱃속에 아비를 알 수 없는 아이를 가지고 있으니 앞으로 헤쳐나갈 길이 오로지 한 가지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선달은 서둘러 요기를 마치고 영월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저녁 늦게 청령포에 닿았는데 불어난 물로 배를 띄울 수 없었다. 더구나 뱃사공에게 상황을 물으니 노산군은 불어난 물 때문에 청령포를 나와 영월 객사인 관풍헌으로 거처를 옮겼다고 했다. 이선달은 서둘러 관풍헌을 찾아가 전하를 알현했다. 어린 전하의 모습은 며칠 전에 보았을 때보다 부쩍 수심이 깊어져 있었다. 김태환 작가  (월·수·금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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