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이 사실이냐. 대군께서 백두대간을 넘어온단 말이지?"
“전하 백두대간은 생각보다 그리 높고 험한 곳이 아니옵니다. 장정 걸음으로 아침에 이곳을 떠나면 재를 넘어 순흥까지 가는데 여섯 시진이면 충분합니다. 해가 떨어지기 전에 닿을 수 있습니다."
“오. 순흥이라는 곳이 그렇게 가까운 거리에 있단 말이냐?"
“그렇습니다. 곧 영월 군수가 전하를 고치령 아래 의풍까지 모실 것입니다."
“오. 정말 그게 가능하다는 말이냐?"
어린 주상은 안면에 환한 미소를 띠었다. 그런 모습을 보는 이선달의 마음은 애처롭기 짝이 없었다.
“전하 조금만 참고 견디시면 곧 좋은 날이 올 것입니다. 낙담하지 마시옵소서."
“알겠소. 그런 날이 올 것이라 하니 내가 힘이 나는 것 같소."
이선달은 관풍헌을 물러 나와 곧장 삼옥마을로 갔다. 삼옥리에서 큰 대추나무가 마당 가에 서 있는 박 부자 집을 찾아갔다. 먼저 주인을 만나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다. 박 부자는 올곧은 사람이었다. 하루아침에 혈혈단신이 되어버린 임장호가 측은한 생각이 들기도 하던 차였다. 옛 각시를 만나 살림을 합친다고 하니 내 일처럼 기뻐했다. 반년 치 새경에 해당하는 백미 한 가마를 선뜻 내어 주었다. 임장호는 갑자기 벌어진 일에 눈만 멀뚱히 뜨고 있었다.
“임처사 기쁘지 않소? 각시가 처사를 기다리고 있는데."
임장호는 대답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이선달은 임장호와 함께 박 부자의 집에서 하룻밤을 머문 뒤 다음 날 아침 일찍 길을 나섰다. 임장호는 갑자기 닥친 일이라 분주하게 움직였지만, 딱히 챙길만한 물건도 없었다. 박 부자에게 인사를 깍듯이 마친 임장호는 새경으로 받은 백미 한 가마를 지게에 지고 이선달의 뒤를 따라갔다. 영월장에 이르러 지고 온 백미를 엽전으로 바꾸었다. 그런 다음 옛 각시에게 선물로 줄 꽃신 한 켤레를 샀다.
두 장정이 부지런히 걸으니 정오가 되기 전에 남대 주막거리에 도착했다 소운과 임장호는 헤어진 뒤 삼 년 만에 만나 서로 부둥켜안고 울었다. 점심을 챙겨 먹고 세 사람은 마구령을 걸어 올라갔다. 고갯마루에 가까워지자 기합 소리가 들렸다. 소운은 처음 듣는 소리에 바짝 긴장하는 눈치였다.
“괜찮다. 산중 오라비들이 운동을 하고 있구나."
이선달은 바로 지나치지 않고 산채마당으로 들어섰다. 언양 무사들이 산 사람들에게 검술을 가르치고 있었다. 이선달이 나타나자 검술 연습을 하던 산 사람들이 일제히 동작을 멈추었다. 이선달보다는 처음 보는 남자와 그 뒤에 꼭 붙어서 따라오는 젊은 색시에게 눈길이 끌렸다. 털보가 대장을 할 때는 이게 웬 떡이냐 하고 달려들어 차례가 다가온 산 사람이 덮쳤을 것이다.
“이 사람들아 그만들 쳐다보게 눈알이 빠지겠네."
이선달이 한마디 하자 바로 눈길을 거두어 갔다. 임영복은 어디 갔느냐고 물으니 오늘도 국망봉에 간 것 같다고 했다. 아침 일찍 고치령 쪽으로 떠났다는 것이었다. 이선달은 아무래도 임영복이 국망봉과 인연이 깊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언양 무사들은 그대로 산채에 머물게 하고 서둘러 마구령 고갯길을 내려왔다.
마구령 고개를 다 내려와 주막으로 들어갔다. 주모가 반가운 얼굴로 이선달 일행을 맞았다.
“아이고, 동상 수고가 많았네."
“이 사람들이 여기에 머물 사람들입니다. 세 사람이 사이좋게 지내보시지요. 윤미는 내가 바로 데려가겠소. 일이 잘만 풀린다면 구중궁궐에서 호의호식하며 살아갈 날이 올 것이오."
“말만 들어도 기분이 날아갈 것 같네. 어쨌든 동상만 믿겠네."
“걱정 마시우. 그리고 이분들은 아직 신혼이니 잘 좀 보아주시오."
주모는 소운의 손을 슬며시 잡았다. 이선달이 보기에 험한 일도 좀 해내겠나 간을 보는 것 같았다.
“당분간은 이 집에서 살도록 하시게. 좀 더 형편이 나아지면 순흥으로 나가 집도 장만하고 전답도 마련해야 안 되겠나. 내가 힘닿는 데까지 도와주겠네." 소운과 임장호는 이마가 땅에 닿도록 인사를 했다. 김태환 작가 (월·수·금 게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