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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 ⓒ장세련
삽화. ⓒ장세련

윤미는 이선달이 물러가자 일러준 대로 대군의 방으로 들어갔다. 시렁에 있는 이부자리를 내려 아랫목에 깔았다. 대군이 벗어준 옷을 차분하게 개어 한쪽에 밀어놓았다. 대군이 자리에 눕자 자신도 윗목에 자리를 깔고 누웠다. 자리에 누워서도 신경이 곤두섰다. 대군이 가벼운 기침 소리만 내어도 온몸의 신경이 펄쩍 뛰었다.    

 한참을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자니 코 고는 소리가 가볍게 들렸다. 그제야 윤미는 마음이 놓이기 시작했다. 혹시라도 깨어날까 봐 감기는 눈을 억지로 치뜨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결에 깜빡 잠이 들었다.

 그 시간에 잠을 못 자고 있는 사람은 따로 있었다. 바로 대군의 시녀인 김련이었다. 잠자리가 적적하면 자신을 불러주면 될 텐데 굳이 근본도 모르는 어린 계집아이를 들이는 이유가 무엇인지 답답했다. 그런 뜻을 노골적으로 내비쳤다가 거절당한 적이 여러 번이었다. 대군의 마음에 들게 하려고 값나가는 사향 주머니까지 구해 품에 넣고 다녔지만 허사였다.

 세상일이란 것이 마음대로 돌아가는 것이 아닌지 순흥부에 관노로 있는 급창이 죽자 하고 김련을 쫓아다녔다. 김련에게 사향 주머니를 구해다 준 것도 급창이었다. 급창은 김련이 아무리 구박을 해도 막무가내였다. 김련이 대군을 마음에 품고 있는 걸 알았지만 개의치 않았다. 귀양을 와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대군의 체면에 시녀를 건드리지는 않을 것 같았다.

 윤미가 배소에 오고 나서 닷새가 지난날이었다. 지금까지 없었던 대군의 행차가 있었다. 순흥부의 군사들이 대군을 호의하고 고치령으로 향했다. 영월에서는 영월 군수가 날랜 군사들을 뽑아 노산군을 호위하게 했다. 고치령을 넘어가면 의풍이 나오는데 경상도와 강원도 그리고 충청도까지 삼 개 도의 경계가 만나는 지점이 있었다. 순흥과 영월 양쪽에서는 자기의 관할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내린 조치였다. 

 대군과 상왕이 만나는 것을 지켜본 수행원들은 모두가 엉엉 소리 내어 울었다. 너무나 기가 막히고 눈물 나는 광경이었다. 두 사람  모두 왕실에서 태어나지 않았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하며 원통해 했다.

 안동 부사 조안효는 파발마가 전해온 소식을 펼쳐 들고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지난번에 안동부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을 해결하러 경상좌수영의 군사들을 안동부로 파견한다는 내용이었다. 열한 명이나 되는 인원이 한군데서 살해당한 일을 예사로 보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더구나 관군이 살해당한 사건이라 철저하게 조사해서 범인을 꼭 색출해 낸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범인을 잡기 위해 의금부에서 나선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경상좌수영의 군사들이 온다는 사실에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안동에는 한명청이 부리는 군사들의 숫자가 만만치 않게 불어나고 있는 참이었다. 그들은 소속이 없는 유령 같은 군사들이었다. 한명청의 사병이나 마찬가지인데 정식 군복을 입고 있었다. 그런 군졸들이 백 명을 넘어섰는데 또 무슨 일을 꾸미려고 좌수영의 군사들까지 보내려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안동 부사 조안효는 소식을 순흥부에도 알렸다. 아무래도 관군을 살해한 데는 순흥부의 대군을 의심해 볼 수밖에 없었다. 연락을 받은 순흥 부사 이보흠은 한여름인데도 학질에 걸린 사람처럼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안동부에서 연락이 오기 전에 이미 한양에서 파발마가 가져온 문서를 보고 간이 콩알만 하게 줄어들어 있었다. 이건 뭔가 다른 일이 벌어질 징조였다. 마구령의 장꾼 살인사건은 이미 범인을 잡아다 옥에 가두어 놓은 상태인데 살인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철기군을 마구령에 파견한다고 했다.

 철기군이라면 평안도나 함길도의 변방을 지키기 위해 편성된 군대였다. 일개 산적 하나를 잡기 위해 철기군을 보낸다는 것은 있을 수 없었다. 이보흠은 부들부들 떨리는 목소리로 이방을 불러 한양으로 보낼 서찰을 쓰게 했다. 마구령의 살인범은 이미 잡아서 옥에 가두어 놓았으니 언제든지 참형을 내릴 수 있다고 썼다. 마구령의 산적들도 오합지졸이라 순흥부의 군사들만으로 모조리 소탕할 수 있다고 했다. 지금은 령을 넘어 다니는 사람들의 안전에 아무 문제가 없음을 강조했다.    

 그날 저녁 늦은 시간에 순흥 부사 이보흠은 대군이 있는 배소로 찾아갔다. 매번 대군이 순흥부로 찾아가던 것과는 반대였다. 이보흠은 본능적인 감각으로 자신의 신변에 커다란 위기가 닥쳤음을 직감했다.

 두 칸짜리 좁은 방에 마주 앉은 두 사람은 매우 심각했다. 안동과 한양에서 받은 내용대로라면 순흥부는 남북으로 군대에 에워 쌓이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저들이 우리보다 선수를 치려는 것 같습니다. 장차 이 일을 어찌해야 될지요?"

 "안동에 한명청이 버티고 있는 한 안동 부사 조안효에게 도움을 청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미 안동부의 손발이 묶인 것과 같습니다. 아무래도 한명회가 우리보다 먼저 움직이려는 것 같습니다. 아주 여우 같은 놈이고 악독한 놈이니까요."

 "그렇지 않소. 한명회는 여우가 아니요. 그는 수양대군의 꼭두각시일 뿐이오. 나는 분명히 알고 있소. 계유년에 김종서 황보인 같은 충신들을 죽인 것은 한명회가 아니라 모두 수양군의 짓이오. 고금을 통틀어 살펴보아도 수양군 같은 자는 일찍이 없었소. 선왕께선 그런 그의 악한 심성을 꿰뚫어 보고 계셨던 것이 분명합니다. 지하에 계신 선왕께선 지금 차마 눈을 감고 계시지 못할 것입니다."

 "이제 어찌 해야 할까요? 저들의 예봉은 피하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흐음. 이 일을 어찌한다. 시간이 너무 촉박하구려."

 두 사람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차근차근 준비한다고 계획을 세웠는데 허를 찔린 것 같았다. 당장 남북 양쪽에서 군대가 들이친다면 막아낼 능력이 없었다. 처음 계획에는 백두대간의 고갯길만 막고 있으면 몇 달은 버틸 것으로 생각했었다. 지금으로서는 한쪽을 막아내기도 쉽지 않을 것 같았다.  김태환작가  (월·수·금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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