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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 ⓒ장세련
삽화. ⓒ장세련

이선달은 갑자기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자신은 대군에게서 들은 이야기이지 출처를 물어본 것은 아니었다. 대군이 철기군이 온다는 소식을 들은 것도 이상하지만 그것을 부인하는 임영복도 이해할 수 없었다.

 "자네는 세상 돌아가는 내용을 어디서 듣고 있는 겐가? 아직도 저쪽에서 자네에게 지시를 내리고 있는 것인가?"

 "당연한 것이 아니겠나. 낮에 잡아먹을 소에게도 아침 여물은 먹인다네."

 "그럼 철기군이 온다는 것은 왜 나온 것인가?"

 "자네는 손자병법이라고 아는가? 거기에 나오는 36계중에 초타경사의 계가 나온다네. 풀을 쳐서 뱀을 놀라게 한다는 계책이지. 아마 금성대군이 놀란 뱀처럼 우왕좌왕하고 있을 것일세."

 이선달은 어금니를 깨물었다. 모든 일이 제대로 굴러가기에는 힘에 부친 것 같았다. 아무래도 칼자루를 쥔 것은 저쪽이고 이쪽은 칼날을 쥐고 있는 기분이었다.

 "자네가 작심했을 것 같으면 미리 알려 주지 그랬나?"

 "그랬더라면 뭐가 달라졌겠나? 전세를 뒤집을 방법은 없네. 어떻게 산적의 무리가 한양의 경군을 막아낼 수 있겠나."

 "경군이라고? 한양의 경군이 온단 말인가?"

 "그렇다네. 경군뿐만 아니라네. 오늘 낮에 안동에 있는 한명천의 군사들이 순흥부에 들어와 있을 것이네. 내일이면 모든 게 끝나겠지."

 이선달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마음을 고쳐먹겠다던 임영복의 말은 모두가 진심이 아니었던 것 같았다. 믿었던 자신이 옴팍 당한 것 같았다. 

 "어찌 사내대장부가 그럴 수 있나? 그래도 명색이 조선 제일의 살수라는 자가 시정잡배들처럼 꼼수를 쓰다니."

 이선달이 일어서서 핏대를 올리는 것과는 반대로 임영복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태연하게 자리에 앉아 있었다.

 "진정하고 곰곰이 생각해보게. 이건 이미 승패가 갈라진 싸움일세. 전세를 뒤집을 방법 같은 건 없었네. 이번 일에 나서면서 크게 깨달은 바가 있네. 나는 내가 조선 제일의 살수인 줄 알았었네. 그런데 그게 아니었어. 나보다 한 수 더 높은 살수가 분명 있었어. 그자가 이 일을 지휘하고 있지. 곧 순흥 땅에 피바람이 몰아칠 걸세. 자네나 나나 이걸 막을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네. 나는 정말 이 일에서 빠지고 싶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소. 그자는 자신의 부귀영화를 위해 인륜을 저버린 자요. 그런 자의 앞잡이를 했다는 것은 역시 천벌을 받을 일이오. 나와 함께 그자를 죽이러 갑시다."

 "이미 때가 늦었다 하지 않았소. 그럴 생각이었으면 벌써 했어야 했소. 지금 살아남으려면 더 고개를 숙이고 아양을 떨어야 할 것이오. 어떻소? 오히려 나와 함께 조선 최고의 살수 앞에 가서 아양을 떨어보지 않겠소? 잘만하면 사대문 안에서 갓을 쓰고 활보할 수도 있을 거요."

 이선달은 치가 떨렸다. 조선의 개로 살지언정 인륜을 저버린 인간 앞에서 머리를 조아릴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다음 날 아침 산채는 분주하게 움직였다. 조반을 마치고 마당에 모인 산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관군이 자신들을 토벌하러 온다는 소식을 들은 터라 모두 불안감에 휩싸여 있었다.

 "이거 무조건 도망부터 치고 봐야 하는 거 아니야?"

 "그러게 말이야. 우리 힘으로 어떻게 군사들을 상대한단 말이야. 개죽음당하기 전에 피하는 게 상수지."

 이선달이 마당으로 나왔다. 모두 불안감에 휩싸여 술렁거리는 줄 빤히 알고 있었다. 이선달도 전면에 나서 전투를 치러본 경험은 없었다. 사람을 죽이는 것과 전투는 엄연히 다른 것이다. 언양 무사들도 마찬가지였다. 맞대결은 자신이 있지만, 전투를 치러본 경험은 없었다.

 "여러분들 모두 내 말을 들으시오."

 이선달이 산 사람들 앞에 나서서 입을 열었다. 모두가 이선달의 입만 쳐다보았다. 

 "여러분들이 처음에 산에 왔을 때는 목숨을 버릴 각오를 하고 들어왔을 것이오. 오늘이 바로 그날이오. 구차하게 살아날 생각일랑 아예 하지를 마시오. 모두 죽을 각오로 싸운다면 그래도 모두 죽지는 않을 것이오. 젖 먹던 힘까지 다하여 싸웁시다. 여기 일당백의 무사들을 따라 열심히 싸워봅시다."

 산 사람들이 술렁거렸다. 특별한 대책이 있을까 하고 기대하던 것이 와르르 무너지자 급하게 실망을 했다. 그때였다. 임영복이 산채 안에서 슬그머니 나왔다. 모두의 시선이 임영복에게로 쏠렸다. 임영복은 이선달이 서 있는 곳을 지나 산 사람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 섰다.

 "여러분들이 아무리 용을 써도 죽는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무엇 때문에 여기서 목숨을 내놓아야 합니까? 여러분이 싸워서 이기면 이 나라가 바로 서기라도 한답니까? 여러분들은 이 나라에서 버림받은 목숨들이오. 여기서 개죽임을 당할 필요가 없소. 내가 여러분들이 살아날 방법을 일러 드리겠소. 여기서 서쪽으로 가면 고치령이오. 그쪽으로 가면 틀림없이 죽을 것이오. 경군은 이곳으로만 오는 것이 아니오. 고치령은 물론이고 죽령으로도 넘어올 것이오. 그러니 여러분들이 달아날 길은 동쪽 태백산밖에 없소. 지금 당장 태백산으로 가는 능선을 따라가시오." 김태환 작가

(월·수·금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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