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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 ⓒ왕생이
삽화. ⓒ왕생이

시작하면서
태화다방 흔적을 찾아 나서던 날은 전신에 힘이 쑥 빠지는, 그냥 아무 데나 기대고 싶은 나른한 봄날의 끝자락이었다. 올해는 초봄 가뭄으로 꽃들이 제대로 필까 했는데 가뭄 덕분에 오히려 벚꽃이 오래 피었다가 졌다. 지금은 쌀밥 꽃(이팝꽃)이 지천이다.(2018년 봄날 기억) 

 울산은 다른 도시들보다 이팝나무 가로수가 많다. 새마을 노래가 한창이던 시절 박정희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기념식수로 이팝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국민이 모두 쌀밥 먹는 그날을 앞당기기 위해서라는…. 쌀밥 꽃이라 불리는 이팝꽃은 꽃말이 뭘까, 즉답으로 영원한 사랑이란다. 사랑! 그것도 영원한 사랑이라면…. 사랑을 들먹였던 젊은 날의 그 풋풋한 아가씨는 어디서 잘살고 있을까. 늙어가다 보면 나름 젊었던 날의 아릿한 추억들이 가끔 생각난다. 그 많은 이야기를 머금고 있는 곳 중 한 곳이 다방이다.

 길을 나서면서 '쨍하고 해 뜰 날'을 기대하며 울산에 왔던 그때를 떠올렸다. 

 현대자동차에 이력서를 내고 해당 부서에서 입사 면접을 보고 고향집에서 합격통지서를 기다리던 1978년 5월 초, 어버이날을 며칠 앞두고 출근하라는 전보가 날아왔었다. 그때는 전보가 가장 확실한 전달 수단이었다. 전보를 확인하니 첫 출근일이 아쉽게도 5월 8일이었다. 하루만 늦춰도 어머니 가슴에 카네이션 한 송이를 달아드릴 수 있었는데 그것이 못내 아쉬웠던 기억이 난다.

 고향을 떠나던 날, 면 소재지에서 출발한 완행버스가 비포장도로 흙먼지를 몰고 달려와서는 필자 앞에 멈추었다. 뒤따라온 흙먼지가 버스를 앞질러서 갔다. 숨을 참으며 버스에 오르자 직직대는 버스 라디오에서 백설희의 가냘픈 음색으로 '봄날은 간다'가 흘러나왔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오늘도 옷고름 씹어 가며 산 제비 넘나드는 성황당 길에/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간다

 1970년대와 80년대 청춘들은 이 노래를 들으면서 봄이 온 줄을 알았고 또 이 노래가 뜸해진다 싶을 때 봄날이 가는 줄 알았다. 손노원 작사, 박시춘 작곡, 백설희 노래로 녹음되어 한국전쟁 이후 1954년에 새로 등장한 유니버설레코드에서 첫 번째 작품으로 발표된 '봄날은 간다'는 가수 백설희의 대표곡 중 하나다. 

 이 노래는 백설희 이후 지금까지 장사익 등 많은 가수가 자신의 레퍼토리처럼 부르고 있다. 지금도 과거 기억으로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가슴이 화롯불에 덴 것 마냥 후끈해진다. 청춘 시절, 모난 돌이 시련을 견디어서 몽돌이 되어가듯 우여곡절을 겪은 새파랗던 시절의 인생살이 역시 쉽게 잊힐 기억은 아닌 것 같다. 

2018년 11월 이때만 해도 태화다방은 영업 중이었다.
2018년 11월 이때만 해도 태화다방은 영업 중이었다. 정은영 제공

우리들의 봄날은 간다
자가용 승용차를 가진다는 것은 일반인들이 함부로 생각지도 못하던 시대가 1970년대다. 차를 만들어내는 현대자동차도 겨우 부서별 업무용 차량으로 '포니2'를 배정했다. 이 차는 원래 목적이 업무용이었지만 일반적으로는 부서장 전용 차량으로 알고 있을 정도였다. 공장 규모가 워낙 커서 업무용 차량이 부서별로 배정됐지만, 부서장이 자기 승용차처럼 함부로 열쇠를 내주지 않았다. 또 그 시절은 운전면허증을 가진 경우가 드물었다. 필자 역시 운전면허증을 취득할 생각조차 하지 않던 시절이었다. 

 그때는 운전면허증이 무슨 대단한 국가기술 자격증처럼 인식되던 때였다. 

 하지만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큰 변화가 왔다. 회사에서 자동차 근무하면서 운전면허증이 없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며 운전면허증 취득기회를 마련해줬다. 회사가 자동차운전학원들과 계약을 하고 등록하는 사원들에게 한시적으로 근무시간을 조절해 줬다. 또 운전학원 강습비를 저렴하게 해주는 바람에 많은 사원이 운전면허증을 취득하게 했다. 

 지금 이야기하면 개도 웃을 일이지만 그때는 운전면허시험에 합격한 사람들끼리 모여서 합격을 자축하는, 거나한 회식을 했다. 

 또 다방에 가서 취득한 운전면허증을 내놓으면 다방 아가씨들이 부러운 눈으로 면허증을 들고 이리저리 살펴보기도 했다. 운전면허증 취득기념으로 당연히 마담부터 레지까지 커피를 돌렸고 형편이 나은 사람들은 다방에서 중국집 배달까지 시켜서 뒤풀이까지 했다. 

 1984년이었을까, 부서장이 서울 출장을 간 날이었다. 운전면허증이 있는 친구와 부서 업무 차량 '포니 2'를 타고 다방 커피를 마시러 갔다. 다방 앞에 차를 세워두었는데 길 가던 사람들이 차를 빙 둘러싸고 구경했었다. 지금 생각하면 귀신 씨 나락 까먹는 소리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세상은 그때부터 급변하기 시작했다. 다방에도 배달 오토바이가 생겼고 그 후, 티켓다방이 성업하면서 배달용 승용차까지 샀던 때가 1990년대다. 그러다가 다방은 경제가 부흥하는 틈바구니에서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결국은 사막의 신기루처럼 사라져 갔지만….

정은영 울산불교문인협회장
정은영 울산불교문인협회장

또 다른 기억 하나…
1980년대는 울산에서 외부로 통하는 교통수단이 우정동 시외버스터미널과 강 건너 월평 고속버스터미널이었다. 어중간한 시간에 나왔다가 차 시간도 어중간하면 별수가 없었다. 차표를 쥐고 다방을 찾았다. 

 어디로 갈까. 거리로는 시외버스터미널 내 터미널 다방이다. 하지만 그 시절 터미널 다방은 도떼기시장이었다.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게 했다. 버스 출발을 알리는 마이크 소음도 문제지만 만년필, 샤프 연필 등등 만물 잡화를 007가방에 넣고 나타나는 장사꾼들이 수시로 들락거렸다. 갑자기 테이블 위에 가방을 펼치고 이것저것 선전을 해대는 바람에 휴식은 아예 포기해야 했다. 그래서 터미널 다방보다는 좀 귀찮아도 주변 다방들을 찾아 나서는 것이 상책이었다.

 시외버스터미널 인근 다방은 버스 시간이 남은 사람들을 위한 공간이었다. 우정시외버스 터미널 앞에는 도로 건너, 과거 가락 병원 지하 행복다방, 우정 지하도 코너 태화다방, 로얄예식장 건너 태화 오일장 입구 청궁다방, 화진다방 정도를 꼽을 수 있다. 이들 대부분 다방이 아직도 영업하고 있다. 

 그중 주상복합 건물 신축용지에 들어가면서 5년 전 다방건물이 철거되면서 약 40년을 버텼던 태화다방이 문을 닫았다. 이 다방이 문을 닫으면서 태화강 둔치 푸르렀던 밀밭의 기억도 함께 사라져 버렸다. 

헐리기 직전 다시 찾은 태화다방
7~8년 전, 아마 다방이 헐리기 직전이었던 것 같다. 이팝꽃이 무리 지어 피던 5월 초순, 태화루에서 우정 지하도 시내버스 정류장으로 가던 중 태화다방 건너편 신호등에서 걸음을 멈췄다. 파란불이 켜지기를 기다리는데 맞은편 건물 2층에 다방역사만큼 두꺼운 먼지가 쌓여서 도리어 땟국이 정겹게 느껴지는 태화다방 간판이 눈에 띄었다. 

 "아직도 영업을 하나?" 갑자기 기억의 필름이 거꾸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 시절 노래 한 곡이 떠올랐다. 1977년 연말부터 1980년대 초반을 강타하며 청춘들의 사랑을 받았던 노래다. 

아니 벌써 해가 솟았나/ 창문 밖이 환하게 밝았네/ 가벼운 아침 발걸음/모두 함께 콧노래 부르며/ 밝은 날을 기다리는/ 부푼 마음 가슴에 가득/ 이리저리 지나치는/정다운 눈길 거리에 찼네

신혼부부들의 주제가로 인기를 끌었던 산울림의 '아니 벌써'라는 추억의 노래를 오늘도 들을 수 있을까. 상상력은 날개를 달았다.  정은영 울산불교문인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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