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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 ⓒ장세련
삽화. ⓒ장세련

 

망설이는 김장복의 마음속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것처럼 군사 한 명이 바가지에 탁주를 가득 담아와 건네주었다. 김장복은 탁주 바가지를 받아 단숨에 벌컥벌컥 들이켰다. 다 들이켜고 난 다음 꿇어 엎디어 있는 안흥선을 노려보았다. 

 '내 좆을 자른 놈. 내 좆을 자른 놈.'

 몇 번이나 입속에서 중얼거렸다. 칼을 잡은 손에 힘을 잔뜩 주었다. 탁주 기운이 올라와 더욱 힘이 났다.

 "어서 실행하시게."

 군사 한 명이 재촉했다. 김장복은 성큼성큼 걸어가 안흥선의 옆에 섰다. 가오리 채찍으로 자신의 등짝을 후려치던 사내가 맞는지 의심이 들었다. 그때의 살기등등하던 모습은 모두 어디로 갔단 말인가? 등짝을 얻어맞은 것까지는 쉽게 잊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칼을 빼 들고 묶여 있는 사람의 양물을 잘라 내다니 생각하면 치가 떨렸다. 제발 그것만은 말아 달라고 얼마나 애원했는지 몰랐다.

 "안 처사. 당신이 내게 한 짓이 있지. 그때 당신이 정말로 그 짓을 할 줄은 생각도 못 했어. 이제 내가 칼자루를 쥐었는데 어떻게 생각하나? 세상은 참 공평하기도 하지. 어디 한 번 살려달라고 애원해 보시게."

 안흥선이 고개를 들어 김장복을 쳐다보았다. 얼굴은 이미 혈색이 변해 죽은 사람 같았다. 안흥선이 씨익 웃었다. 김장복은 소름이 끼쳤다.

 "지금 네놈한테 애원한다고 살 수 있을 것 같으면 그렇게 하겠다. 그런데 그게 아니잖아. 네놈도 손에 피를 묻히고 나면 매일 밤 편하게 잠자리에 들지는 못할 것이다. 손에 피를 묻힌 자는 결국 제명에 죽지 못하게 되어 있다. 어서 망설이지 말고 죽여라."

 김장복이 대꾸도 없이 칼을 번쩍 들었다. 도끼로 장작을 내려치듯 목을 향해 칼날을 내려쳤다. 순식간에 안흥선의 목이 바닥에 뚝 떨어져 떼구루루 굴렀다. 목이 잘린 자리에서 붉은 피가 샘물처럼 솟구쳤다. 잠시 후에 목이 잘린 몸뚱이가 맥없이 옆으로 픽 쓰러졌다.

 다음은 예천 댁의 차례였다. 불과 넉 달 전에도 만삭의 몸으로 자신과 정사를 나눈 여인이었다. 여러 여자를 상대해 보았지만 예천 댁처럼 재미나게 즐기는 여자는 처음으로 상대해 보았다. 누워서 송장처럼 가만히 있는 여자와는 확실히 달랐다. 소리를 지르고 몸을 꼬고 하는 동작이 남자의 힘을 바닥까지 소진하게 했다. 돌이켜보니 자신은 꿀통에 빠져 죽게 된 꿀벌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운우의 정에 취해 있을 때는 목숨 따위는 하찮게 버려도 괜찮겠다는 생각까지 들었었다.

 "예천 댁 우리가 왜 이렇게 만나야 하지?"

 예천 댁이 김장복을 올려다보았다. 처음에는 연민의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점점 조소의 빛을 띠었다.

 "이보게. 예천 댁. 자넨 살고 싶지 않은가? 저 아이도 키워야 할 것 아닌가? 참 오늘 처음 알았네만 저 아이가 내 아이가 맞는가? 자네가 원한다면 아이를 데리고 나와 함께 살게 해달라고 부탁해 보겠네."

 "바보 같은 산적 놈아. 그렇게 네 맘대로 될 거라고 생각하느냐? 내 지아비를 죽인 산적 놈과 어떻게 같이 산단 말이냐. 인륜을 어기고도 살 수 있을 것 같으냐?"

 "무슨 소리? 지금은 나라님도 자기 피붙이들을 죽이고 뻔뻔하게 사는 세상이 아니던가."

 "하하하. 참 더러운 세상에서 오래오래 살다 오너라."

 예천 댁은 그 말을 끝으로 입을 닫아버렸다. 김장복이 하는 수 없이 칼을 번쩍 들어 예천 댁의 목을 내려쳤다. 예천 댁의 목도 바닥에 떨어져 떼구루루 굴러가 안흥선의 머리 옆에 멈추었다. 김장복은 두 사람의 눈이 자신을 동시에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아 속이 뜨끔했다. 

 다음부터는 미친 망나니처럼 칼을 마구 휘둘러 안흥선의 남은 식솔들을 도륙했다. 백일 지난 자신의 아이 앞에서 잠시 주춤했지만 이미 눈이 뒤집혀 있는 상태라 그대로 아이의 목을 자르고 말았다. 열 명이 넘는 사람이 목이 떨어져 나가자 쏟아진 피가 냇물로 흘러 들어갔다. 죽계천의 물이 흘러든 피로 붉게 물들어 아래로 흘렀다.  (월·수·금 게재됩니다) 김태환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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