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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원 시조시인
이서원 시조시인

아들이 무슨 큰 비밀인 듯 나를 불러 자기 속내를 말한 후 "아빠! 절대 누구에게도 말하지 마세요!" 한다. 알았다고 몇 번이나 안심을 시켰지만 그래도 미심쩍은지 이 말이 새어나가면 다 아빠 탓이라며 한 번 더 다짐을 받는다. 이미 자기 입에서 말이 나가는 순간 비밀은 비밀로 존재하기가 어렵다는 걸 아직은 모르는가 보다.

연나라 태자인 '단'은 진시황을 암살하고자 '전광'이라는 사람을 만나 계획을 의논했다. 그리고 헤어지면서 문 입구까지 나와 배웅하며 "제가 말씀드린 일들과 선생이 말씀하신 것은 모두 나라의 큰일이니 누구에게도 말하지 마십시오" 그러자 전광은 고개를 숙이고 웃으며 "알겠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그리고 형가에게 일을 추진하게 한 후 전광은 "뛰어난 인물은 남에게 의심받는 일은 하지 않는 법이오. 그런데 태자는 나라의 대사에 관한 것이니 남에게 말하지 말라고 나에게 말했소. 이 말을 들은 나는 일단 태자에게 의심을 받은 것이오. 남에게 내 행동을 의심받는다면 이미 의사(義士)라 할 수는 없소"라며 그 자리에서 스스로 목을 찔러 자결했다.

또한 성경에도 의심하는 자는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라고 했다. 두 마음을 품어 정함이 없는 자가 이 세상에 어찌 한 둘이겠나.

의심의 시작은 참으로 사소하다. 그러나 의심이 의심을 불러오기 시작하면 겨자씨만한 것도 금방 태산처럼 커지기가 쉽다. 앞의 전광과 태자 이야기는 어쩌면 아주 작은 일화에 지나지 않는다. 

삼국지에 보면 의심이 부른 더 큰 참극이 나온다. 포악한 장수인 동탁을 암살하려다 실패하고 조조는 도망을 치는 신세가 됐다. 동탁은 전국에 조조의 인상착의를 붙이고 그를 잡는 자에게 엄청난 현상금을 걸며 삼엄한 경계를 펼쳤다. 수도인 낙양을 떠나 중모현에서 조조는 끝내 진궁에게 붙잡히고 만다. 그러나 진궁은 조조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에게 호의를 느끼고 함께 도망을 치기로 결의했다. 마침 조조의 아버지와 의형제를 맺었던 여백사를 찾아갔다. 여백사는 자기 아들과 다름없는 조조를 구해준 진궁에게 진심으로 감사해하며 몸을 굽혀 인사를 했다. 그는 두 사람을 위해 술상을 차리겠다고 했다. 마침 술이 떨어진 터라 여백사는 서촌에 가서 술 한 단지를 사올테니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했다. 

그러나 한참이 지나도 여백사는 돌아오지 않았다. 조금만 기다리고 있으라 했건만…. 갈수록 마음이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마침 뒤뜰에서 칼 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귀를 바짝 기울였다. "묶어서 죽일까. 그냥 죽일까" 둘은 쓰러질 뻔했다. "혹시라도 놓치면 어쩌겠나. 그냥 묶어서 죽이세" 밖의 대화는 더이상 들어볼 필요가 없었다. 분명히 자기들을 죽이려는 말이었다. 두 사람은 터럭이 쭈뼛 섰다. 눈빛을 맞춘 그들은 몰래 후원으로 가 무참히 살해해 버렸다. 마당은 그야말로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여백사의 처자식과 하인 등 여덟 명을 죽였다. 그러고도 혹시 누가 보았을까 싶어 집을 샅샅이 뒤지다 부엌에 묶인 돼지를 보았다. 아뿔싸! "돼지를 죽인다는 말을 우리가 의심해 이렇게 만들고 말았구려" 우리를 대접하려고 돼지를 잡는 것도 모르고…. 그러나 후회는 이미 늦었다. 그들은 황급히 집을 떠나왔다. 말을 달리다 저 멀리서 나귀를 타고 오는 여백사를 만났다. 서둘러 떠나는 두 사람을 잡고 "어디를 가시는가. 여기 술을 사 왔으니 다시 집으로 가서 한 잔 합세 그려" "죄인의 신분으로 어찌 오래 집에 머무를 수 있겠습니까" 태연히 말을 꾸미며 둘은 서둘러 그 자리를 뒤로했다. 그러다 가던 길을 다시 돌아와 여백사 마저 무참히 살해하고 말았다.

한번 의심이 들기 시작하면 이렇게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흐른다. 의심 없이 진정으로 믿는다는 일이 어디 쉬운 일이겠나. 조조와 진궁이 가진 잘못된 마음이 이렇게 참혹한 현장이 될 줄이야. 돼지를 잡아 대접하겠다는 호의에 의심이 부른 참변이다. 돼지를 보고서야 의심은 풀렸지만 여백사 마저 죽이는 잔혹한 인간사의 한 단면이 어찌 저 두 사람뿐이겠나. 

저마다 선거 공약을 내걸고 온 나라가 들썩이던 지방선거가 끝이 났다. 공약(公約)이 공약(空約)으로 돌변하는 걸 어제오늘만 보아온 터는 아니다. 유권자들을 속이고 현혹시키며 오로지 당선에만 몰두했던 치열한 선거전의 뒷맛은 언제나 씁쓸했다. 거리에 찢어진 벽보와 끈 떨어진 현수막이 나뒹굴고 있다. 선거에 뛰어들었던 많은 이들이 당락의 결정으로 희비가 엇갈리는 오늘, 당선자가 내놓았던 약속을 이번만큼은 꼭 믿고 싶다.

집의 하인들을 다 살해하고 나서야 돼지를 통해 의심이 풀렸던 저 현장이 마치 지금까지 우리가 살아온 과거였다고 치자. 이제 의심은 풀렸으니 믿는 일만 남았다. 그것은 당선자와 우리의 의지에 달렸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는 성서의 말씀이 어찌 사도에게만 해당 되는가 싶어 다시 무릎을 꿇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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