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즈벡산 등반거대한 바위산, 마치 달마대사처럼 세상을 다 초월한 듯 웃고 있는 모습이다. 국경을 스스로 자처하며 우뚝 솟은 고봉준령에 가슴이 확 트인다. 산 입구에 핀 자잘한 봄꽃 향기가 운무처럼 일렁인다. 저 건너편 산정은 눈부신 고립처럼 설산의 빙하로 우뚝 솟았다. 변화무쌍한 세상의 춘하추동을 부러워하지 않은 채 오로지 자신만의 곧은 성정을 스스로 지키며 가는 성자 같다. 아름다운 얼굴 다 보여주지 않는 면사포 쓴 신부의 자태나는 지금 저 산을 오르려 한다. 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거대하여 마치 한 편의 대서사시를 읽는 듯하다.
간간이 개 짖는 소리만이 고요를 찢는 카즈베기(Kazbegi). 수천 미터의 산에 둘려있어서인지 어둠은 더 짙다. 종일 예까지 달려오느라 피곤하지만 쉽게 잠들지 못한다. 창을 여니 적벽의 눈바람이 들이치는지 서늘하다. 의자를 바투 당겨 앉아 뜨거운 차를 마시고 굵직한 첼로 음악을 켠 채 모로 누웠다. 조금 전 데스크에서 만난 리사(Lisa)를 생각했다. 체크인(check-in) 할 때 우리말로 "안녕하세요"라며 인사를 했다. 깜짝 놀라 바라보니 오뚝한 콧날을 더 가까이하며 자랑했다. "아줌마" "아버지" "언니", 내가 웃자 한국을
가뜩이나 좁은 도로를 달리느라 초긴장의 연속인데 길옆으로 주차된 대형 트럭은 끝이 없다. 모두 러시아로 들어가는 물류 차량이란다. 몇 날을 참고 기다려야 국경선을 넘을지 장담할 수 없기에 운전자들은 여유롭게 풀숲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가도 가도 이어진 차량 행렬이다. 이 모든 차량은 러시아와 무역을 하려고 이웃한 아르메니아, 카자흐스탄, 튀르키예, 타지키스탄 등에서 왔단다. 곡예 운전을 하느라 몸도 마음도 지쳐갈 즈음이었다. 산 중턱에 이르렀는데 고산으로 펼쳐진 푸르디푸른 초원을 보는 순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뒤로는 눈
공항에서 달러를 조지아 화폐인 라리(Lari)로 환전을 했다. 우리 돈 약 460원 정도가 1라리로 보면 비슷하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으로 인해 환율이 작년보다 많이 올랐다. 우리나라에 있는 동안 지난해에 만났던 택시기사인 '짜카리아'는 한 달에 한 번 정도 내게 문자를 보내왔다. "잘 지내느냐?" "너는 오면 돈을 안 쓸 거다" "우리 집에서 원하는 만큼 지내라" 등 짧은 안부였지만 진심이 느껴지는 좋은 친구였다. 비행기를 예매도 안 했는데 몇 달 전부터 계속 언제 올 거냐며 어린애처럼 졸라댔다. "곧 갈게" 답을 보내고부
조지아, 이름도 생소한 이 나라가 도대체 어디에 있는지조차 몰랐던 조그마한 땅! 그러던 어느 날, 아름다운 흑해를 품고 프로메테우스의 신화를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며 인정이 넘치는 나라임을 알게 되었다. 그날 이후 어린애가 인형을 안고 자듯이 날마다 조지아를 품에 안고 잤다. 그것도 몇 달을 끙끙 앓듯이 뒤척이다 끝내 주섬주섬 짐을 챙기고 무작정 집을 떠났다. 그곳 5월은 우기, 아직 끝나지 않은 코로나, 그러나 이런저런 이유를 갖고 내 발걸음을 붙잡고 싶지 않았다. 마치 첫사랑을 만나러 가듯 설렘만으로도 충분한 가치가 되었고 즐거움이
"지금 신에게는 아직도 12척의 전선이 남아있습니다." 이순신 장군의 비장하고 결의에 찬 저 충언이 임진왜란을 마침내 승리로 이끌지 않았을까. 원균인들 나라 걱정을 왜 하지 않았겠나. 충성심은 같았을지라도 서로 방법의 차이에서 승패의 좌우가 갈라졌을 것은 분명하다. 지금 대한민국의 좌우, 동서, 여야 대립은 외세의 침략보다 그 혼돈이 조금도 덜하지 않다. 자기 진영의 패권을 위해서라면 누구라도 밟고 올라서야만 하는 매정하고 냉혹한 정치의 이념이 극에 달하고 있다. 이제 새해의 서막이 올랐고, 총선의 계절인 잔혹한 4월이 손에 잡히는
팔순의 어머니가 감기에 걸려 연일 시름이다. 아직은 까딱없다며 늘 청춘인 양 웃으며 나를 더 염려하지만, 세월에 장사 없다는 말이 요즘처럼 실감해 본 적도 없는 듯하다. 오늘처럼 야윈 노모랑 나란히 누워 도란도란 12월의 깊어가는 겨울밤을 보낼 시간도 몇 해나 남았을까. 평생을 잠옷이라곤 모른 채 그냥 낮에 일하던 옷 그대로 입고 곤한 잠자리에 들던 지치고 고단했던 삶을 어찌 모르겠나. 처음으로 어머니에게 잠옷을 사 드렸다. 그 옷을 입어 보고는 잠이 어찌나 단지 모르겠다며 이 엄동설한에도 오로지 단벌 신사처럼 입고 주무신다. 간간
서양화가인 친구가 전시회를 한다기에 들뜬 마음으로 찾아갔다. 큰 화폭을 다 채운 강렬한 푸른 채색 너머 형형색색의 간결한 붓 터치가 조화롭게 그려져 있었다. 조명아래 그림은 마치 이 시대가 나아가야 할 방향의 메시지를 전하려는 듯, 살아 움직이는 물결처럼 출렁거렸다. 조선 후기 문장가 연암 박지원이 대륙의 광활한 요동벌판을 보고 크게 한바탕 울어볼 만한 터라고 명명한 '호곡장(好哭場)'처럼 그림의 문외한인 나에게도 그 감회가 다가왔다. 어떤 사물을 함께 보았다고 해서 같은 감동을 받는 건 아니다. 자기만의 시선과 해석을 통해 각자에
라디오를 듣다 보면 저마다의 사연이 어찌 그리 많은지…. 이런 늦가을이면 라디오를 틀어놓고 밀양으로 가는 국도를 타고 구불텅한 옛길을 넘으며 혼자 호사스러운 여행을 즐기곤 한다. 천황산, 가지산을 타고 흐르는 붉은 단풍잎도 좋고, 가지가 부러질 듯 위태로운 나무에 매달린 태양 빛 닮은 사과는 꽃보다 더 아름답다. 바이올린 연주가 마치 유자색처럼 은은하고, 거기에 이어진 독자의 사연이 마음을 더 훈훈하게 만들어 주었다. 사연인즉, 둘은 여고 시절 같은 반 친구였지만 그저 데면데면 지내던 사이였다. 그런데 그해 가을, 버스로 수학여행을
들녘이 비워지는 늦가을이다. 까마귀가 전선에 무리지어 앉아 먼 하늘을 우러르는 모습을 보노라면 왠지 처연하다. 해마다 이맘때면 연례행사처럼 잊지 않고 꼭 한 번은 찾아가는 곳이 있다. 누구에게나 퀘렌시아가 있듯이, 나 또한 그런 곳이 있다. 울산에서 경주로 가다가 통일전 사거리에서 좌로 들어가 경주수목원 부근에 이르면 양지촌이 있다. 그즈음 입구에 차를 세우고 호젓한 길을 타박타박 걸어가면 솔숲의 짙은 향내와 바람 소리가 반겨준다. 천년 서라벌의 남산 자락, 돌 하나에도 느꺼운 숨결이 흐르고, 화랑정신이 자락자락 스며들지 않은 곳이
시골 뒷산에 올라가면 양지바른 쪽에 키 낮은 무덤이 있다. 무심코 보면 무덤인지 그냥 둔덕인지 모를 정도다. 그런데도 해마다 추석 녘이면 주위 어느 산소보다 먼저 와서 깔끔하게 벌초를 하고 간다. 그 흔한 비석도 없다. 곁에 푸른 소나무 몇 그루만 휘어져 있을 뿐, 한 번도 아랫대의 자손을 본 적은 없다. 솔방울 서너 개가 말끔하게 정돈된 산소 주위에 떨어져 뒹굴고 있지만, 왠지 시골 할머니의 품속처럼 온기가 느껴진다. 어머니의 팔순을 맞아 처음으로 온 가족이 모여 가족사진을 찍었다. 언제부턴가 어머니는 가끔 지나가는 말로 '칠국댁
악기를 잘 다루거나, 노래를 곧잘 부르는 친구들이 부럽다. 초등학교 동기회에 가면 행사 마무리는 언제나 노래방에서 한 곡조씩 부르는 것으로 마무리가 되곤 한다. 그때마다 음주 가무가 안되는 나로서는 여간 곤혹스러운 게 아니다. 두어 번 손사래를 치다가 슬그머니 그 자리를 빠져나오고 만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음악 시간에 앞에 나가서 노래를 불러 점수를 받았는데, 그날 내가 70점 이하라는 걸 알았을 때부터 이미 노래는 포기하고 말았던 것 같다. 이후, 하모니카, 대금, 오카리나 등을 혼자 배워보았지만, 그것도 내 호흡이 짧아 두어
처음이 있으면 끝이 있는 게 세상의 영원한 진리다. 특히 나라의 흥망성쇠는 이 지구상에 끝없이 이어져 온 약육강식의 표본이다. 우리나라의 역사만 보더라도 고구려, 백제, 신라, 그리고 고려, 조선, 분단된 대한민국에 이르기까지 외세의 침략을 포함하면 전쟁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추석에 수안보에 있는 미륵리에 들렀다. 장인어른과 너럭바위에 앉았는데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이곳 전설을 이야기해 주신다. 신라의 마지막 왕자였던 마의태자의 아버지 경순왕이 나라를 고려의 왕건에게 이양하고 백성을 살리는 길을 택했다. 그러자 태자와 덕주
옛 무속 신앙의 무당은 길흉화복을 점치며 의원처럼 병을 고치는 일도 함께 했다. 점을 보거나 점괘를 통해 그 병의 경중을 판단하며 생사를 보살폈다. 예나 지금이나 의사에게는 환자를 보살펴 그 생명의 존엄을 지키려는 인식이 바탕에 있다. 그들이 보살피는 환자가 생을 다하면 마음 한구석 무너지는 허탈감도 있었으리라. 그러나 반대로 장인(匠人)은 관을 만드는 사람이다. 그는 관을 짜서 팔아야 생계를 유지할 수 있다. 그러니 누군가 죽어야만 그가 삶을 이어갈 수 있으니 이 둘의 상관관계를 우리가 무어라 판단 할 수는 없다. 누구는 생명을
처가에 가려면 중부내륙고속도로를 이용한다. 충주 표지판이 저만치 보일라치면 어김없이 괴산 나들목이 나타난다. 산세가 높고 험준한 산골이지만 그곳 근방에 오면 조선시대에 시인으로 크게 이름을 떨친 백곡(柏谷) 김득신(1604~1684)이 떠올라 옅은 미소를 자연스레 머금게 된다. 바로 이 고장 충민사 옆에 그가 세운 취묵당이 있기 때문이다. 어려서부터 타고난 천재라는 소리를 듣는 이도 더러 있겠지만, 보통은 열심히 공부한 이후에 빛을 보는 게 일반적이다. 그는 어릴 적 천연두를 심하게 앓았기 때문인지 머리가 명석하지 못했다. 열 살이
인과법칙이라는 말이 있다. 모든 만물은 그 원인과 결과가 있다는 뜻이다. 온 우주의 질서가 저절로 이뤄진 게 없다는 건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작은 이쑤시개 하나도 누가 만들지 않고 하늘에서 저절로 툭 떨어지진 않는다. 시골집 뒷마당에 호박꽃이 피고 호박이 달렸다. 무심코 바라보았던 것이었지만, 의미를 부여하면 그저 고맙고 경이롭다. 어찌 저것이 꽃이 피고 열매를 맺어 이 아침 밥상에 올라 어머니와 내가 도란도란 마주 앉아 먹을 수 있겠냐 말이다. 연한 호박잎 한 쌈을 싸 볼이 미어터지도록 입에 넣고 우물우물 씹으며 바라보는 어머니의
조지아의 카즈베기는 트빌리시에서 약 150㎞ 이상을 달려가야 만나는 자그마한 소도시다. 그곳에 가려면 오직 한 길, 즈바리 패스뿐이다. 한국에서 조지아까지 비행기로 만 하루가 소요되었지만 지금 이 고도(高道)를 넘는 시간이 더 긴장되고 조마조마하다. 해발 2,000m가 넘는 산길이 아찔해서가 아니다. 구다우리 전망대의 아름다운 풍경도, 구절양장 코카서스 산맥의 자태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프로메테우스의 신화로 더욱 유명한 5,000m 설산이 저 멀리 있지만, 오직 한 곳에 마음이 가닿아 있기 때문이다. 테레크강의 협곡을 건너 카즈
어릴 적 동네에 홀로 사는 노파가 있었다. 그 집 흙담은 다 무너져 가고 초가지붕은 곧 쓰러질 듯 위태로웠다. 그러나 마당 한쪽에 붉은 접시꽃은 해마다 피어 장독을 훤하게 밝혀 주었다. 눈이 멀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은데도 건넛방에는 온갖 식료품들과 과자 등을 갖추어 놓고 동네 구판장 역할을 했다. 어머니는 밭일로 늦게 돌아오면 국수를 사 오라며 심부름을 시키곤 했다. 땅거미가 내려앉은 감나무 뒷길을 종종걸음으로 그 집에 이르면 어둠은 더욱 깊고 고요했다. 정적만이 감도는 마당에서 "할매요!" 하고 부르면 내 목소릴 단박에
좌측에서 보면 모든 게 우로 정렬돼 있다. 또 우에서 보면 역시나 모든 게 좌로 줄을 서 있게 마련이다. 좌우상하의 방향성은 내 위치에 따라 바뀌는 게 당연지사다. 그런데도 우물 안에서 본 하늘이 전부인 것인 양 우기는 개구리처럼 우리 사는 세상도 이와 꼭 같다. 지금 나라는 이분법의 이념에 갇혀 있으니 참으로 안타깝다. 무조건 따르라는 막가파식 이론이 아니라 자기 소신 발언을 할 줄 아는 단 한 사람을 찾기가 이리도 어렵단 말인가. 거슬러 올라가 보면 노론과 소론, 동인과 서인, 남인 북인, 가깝게는 좌우익의 대립으로 남과 북이
새벽 5시 20분이면 어김없이 알람 소리가 울린다. 부스스 눈을 뜨면 벌써 창으로 희뿌연 동이 밝아오고 있다. 저 태양의 끝없는 무한 반복처럼 다시 하루가 시작되면 무거운 몸을 일으켜 일터로 향한다. 스물여덟에 입사해서 꼭 그만큼의 숫자를 더한 직장 생활을 하고 있으니 이제는 슬슬 퇴직이라는 이야기를 나눌 때가 되었다. 숱한 어려움이 있었지만, 고비의 순간마다 지혜롭게 파도를 헤치며 여기까지 왔다. 때로는 아침에 눈 뜨기가 싫어 몇 분 더 뒤척이다 세수도 못 한 채 헐레벌떡 출근할 때도 있었다. 가장의 어깨에 매달린 가족을 생각하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