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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원 시조시인
이서원 시조시인

"너는 그 것도 못하냐?"는 말을 자주 듣는다. 자존심을 건드리는 말일 수도 있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무엇하나 똑 부러지게 잘난 게 없는 내 탓이다. 배구, 사진, 악기 등을 해보았지만 뚜렷하게 성과를 나타낸 것이라곤 없다. 급기야 의기소침해서 다시는 무엇을 시작하겠다는 용기마저 상실하고 말았다.

 초등학교 때 줄곧 외웠던 국민교육헌장에 보면 '저마다의 타고난 소질을 개발하고'라는 문장이 있다. 내게 타고난 소질은 무엇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없다. 무엇을 개발하려고 해봐도 끈기없는 근성 탓에 포기가 먼저였다.
 조선 후기 추사 김정희는 글씨, 금석학, 그림 등 다재다능함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다. 좋은 환경과 재주를 타고났던 것일까. 그는 영조의 딸인 화순옹주의 증손으로, 지금으로 말하면 엄친아 집안에서 승승장구하여 역사의 중심으로 뛰어 들어갔다. 북학파 거두인 박제가의 제자가 되었으며, 후일 청나라 연행에서도 뛰어난 학자로 칭송받았다. 그러나 시대는 그에게 탄탄대로만을 열어주지는 않았다. 정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어 급기야 55세 노구에도 불구하고 제주도로 유배길에 오르게 되었다.

 여기서 전설처럼 흘러오는 이야기가 있다. 한양을 떠나 해남에 도착했을 때다. 초의선사가 있는 대흥사에 들렀다. 그때 추사는 '대웅보전'의 편액 글씨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저게 글씨냐. 어찌 저런 글씨를 버젓이 걸어놓을 수 있느냐며 당장 붓과 벼루를 가져 오게 했다. 그리고 일필휘지 예서체로 '대웅보전'을 써서 교체하라고 일렀다. 본래 글씨는 당대에 추사가 그토록 폄하, 평가절하했던 원교 이광사의 글씨였던 것이다. 9년의 유배 생활이 끝나고 다시 대흥사에 들렀다. 그동안 그도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조금은 성정이 누그러졌던 탓일까. 다시 그 자리에 원교가 쓴 그 본래의 편액을 걸라 했다.

 사실이지 원교 또한 선대의 야인으로 지냈지만 나주 괘서사건에 연루되어 유배형에 처해진다. 의금부에 끌려온 원교는 하늘을 향해 "내게 뛰어난 글솜씨가 있으니 내 목숨을 버리지 말아달라"고 통곡했다. 이를 불쌍히 여긴 영조가 구해 주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원교는 죽을 때까지 23년간 유배 생활을 하면서도 글을 놓지 않았다. 50년간 야인과 유배 속에서 그의 삶이 녹아있는 행초, 행서, 해서까지 울분을 토해내듯 쓴 체가 모두 삐뚤삐뚤하다. 오죽하면 그의 글씨를 일러 붓이 노래하고 묵이 춤추는 '필가묵무筆歌墨舞'라 했겠나. 그 시대의 독보적인 인기를 누렸던 원교였지만 추사는 그의 글씨를 인정하지 않았고, 가장 졸렬한 비판인 '배우지 못한 탓'으로 치부했었다. 원교보다 약 10년 뒤 태어난 추사가 만난 적도 없으면서 어찌 그리도 야박하게 원교의 글을 폄훼했을까 싶다. 고수는 고수끼리 알아본다는 말처럼 추사는 그를 자신보다 더 윗길이라고 여기는 마음이 있지 않았을까.

 동시대의 경쟁자는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인정하기 싫어도 상대의 능력을 인정해야만 하는 일이라면 먼저 손 내미는 아량과 배포가 있었으면 좋겠다. 피겨 여왕 김연아와 아사다 마오, 빙상의 여제 이상화와 고다이라 등 수많은 경쟁 상대가 있기에 그들은 서로 선의의 노력을 통해 더욱 발전된 기량을 연마할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저놈만 없었다면 내가 분명 1등인데…' 살면서 한 번쯤 그런 마음 들지 않은 이가 어디 있겠나. 그러나 그럴수록 더 최선을 다하는 모습에서 발전해 가는 자신을 만날 것이다.
 정치, 기업, 문화 등에는 수많은 경쟁자가 있고, 모두가 고지를 향해 달음박질하는 대평원에 서 있다. 취업문은 바늘구멍인데 그곳을 통과하려는 이들은 낙타보다 더 크고 넓으니 어쩌면 좋을까.
 원교 이광사와 추사 김정희가 쓴 글씨를 나란히 보면서 그들의 다함없는 열정과 깊이에 배여 있는 묵향이 느껴진다. 붓끝이 멈추는 끝에서 그들의 눈빛과 겹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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