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누리' 출신의 '아나'라는 여인이 성이 포위되어 공격을 당할 때 비밀 터널을 이용해 성에 피신한 사람들에게 몰래 물과 식량을 제공했다. 그녀가 붙잡혀 모진 고문을 당해 죽으면서도 끝까지 비밀을 발설하지 않아 숨은 사람들의 목숨을 구해줬다. 이후 이곳을 사람들은 '아나누리'라고 불렀다.
'누리' 출신의 '아나'라는 여인이 성이 포위되어 공격을 당할 때 비밀 터널을 이용해 성에 피신한 사람들에게 몰래 물과 식량을 제공했다. 그녀가 붙잡혀 모진 고문을 당해 죽으면서도 끝까지 비밀을 발설하지 않아 숨은 사람들의 목숨을 구해줬다. 이후 이곳을 사람들은 '아나누리'라고 불렀다.

공항에서 달러를 조지아 화폐인 라리(Lari)로 환전을 했다. 우리 돈 약 460원 정도가 1라리로 보면 비슷하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으로 인해 환율이 작년보다 많이 올랐다. 우리나라에 있는 동안 지난해에 만났던 택시기사인 '짜카리아'는 한 달에 한 번 정도 내게 문자를 보내왔다. "잘 지내느냐?" "너는 오면 돈을 안 쓸 거다" "우리 집에서 원하는 만큼 지내라" 등 짧은 안부였지만 진심이 느껴지는 좋은 친구였다. 비행기를 예매도 안 했는데 몇 달 전부터 계속 언제 올 거냐며 어린애처럼 졸라댔다. "곧 갈게" 답을 보내고부터는 더욱 집요했다. 하는 수 없이 내 말에 약속을 지켜야겠다는 핑계로 이렇게 두 번째 조지아를 방문했다. 

공항을 나서자 그가 저만치서 뛰어오며 단박에 알아보고 손을 흔든다. 그의 아내 '나티아'도 활짝 웃으며 함께 왔다. 부부는 나를 태우고 자기 집으로 시원하게 달렸다. 트빌리시 수도를 벗어나 1시간가량 달렸을까. 드디어 그가 사는 시카룰리쉬빌리 마을 집에 도착했다. 마당에는 연붉은 장미, 선인장, 갖가지 화초와 화분들이 가지런히 정리된 아담한 전형적인 2층 시골집이었다. 

택시기사 짜카리아(가운데)와 그의 아내 나티아와 필자.
택시기사 짜카리아(가운데)와 그의 아내 나티아와 필자.

우연히 탄 택시의 기사와의 인연이 우정으로

부엌 옆에 작은 식탁이 있는 거실에 들어서자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이모님이 나를 친아들처럼 환대해 주었다. 저 먼 땅 한국에서 온 내가 도대체 무어라고 이리도 반겨준단 말인가. 자정을 넘은 시간인데도 계속해서 부부는 내 앞으로 음식을 옮겨주기 바빴다. 연한 포도 잎으로 감싼 우리네 망개떡 같은 것도 있고, 전통 음식인 만두와 비슷한 낀깔리, 피자를 닮은 빵, 가지볶음 등 한 상 가득했다. 와인의 나라답게 큰 병에 가득 담아 온 술을 내 잔에 채웠다. "우리 우정 만세!" 그는 조금도 취하지 않은 듯 기분 좋아 어쩔 줄을 몰랐다. 

마침 오늘이 부부의 결혼기념일이라고 했다. 그들의 파티는 친구들이 모여 보통 1인당 와인 열 병 정도는 마시는 게 관례란다. 나는 입을 다물지 못하자 연신 웃음이다. 조지아 전통 술잔인 '깐지(kantsi)'를 갖고 와 나에게 술을 권한다. 뿔 모양이라 한번 따르면 바닥에 세울 수 없으니 단박에 마셔야 한단다. 술을 잘 마시지 않는 나로서는 여간 곤혹이 아니었다.

준비해 간 선물을 꺼내 부부에게 건넸다. 밤색 가죽옷은 그의 아내에게 주었는데 꼭 맞았다. 어쩜 이리도 안성맞춤이냐는 듯 내 손을 잡으며 고맙단다. 짜카리아에게는 검은 가죽옷을 주었더니 싱글벙글이다. 조금은 커 보이기도 했지만, 겨울에 입으면 그만이라는 듯 내 어깨를 두드리며 함박웃음에 밤이 새벽을 건너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사람의 인연이란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가를 새삼 깨닫는다. 작년에 왔을 때는 코로나 시국이라 우리나라로 입국하려면 이곳 조지아에서 검사를 받아야 했다. 그때 병원을 가기 위해 탄 택시의 기사가 바로 오늘의 짜카리아였다. 내가 가고자 했던 국립 병원을 두 군데나 갔지만 모두 문이 닫혀 있었다. 그가 궁금했던지 왜 병원에 가느냐고 물었고, 코로나 검사를 위해 간다는 대답에 내 말을 알고 어디론가 전화를 해 주었다. 이후 간 곳이 지금의 아내가 간호사로 근무하는 병원이었던 것이다. 이곳에서 친절한 아내의 도움으로 무사히 코로나 검사를 받았고 검진표까지 직접 휴대폰으로 보내주었던 인연이 오늘을 있게 했다. 

짜카리아의 집.
짜카리아의 집.

2000미터 넘는 산굽이 돌고 돌아 카즈베기로

아침을 먹고 그들과 마당에 서서 사진을 찍었다. 선한 인상의 아버지와 어머니 그의 아들까지 빙 둘러섰다. 담장 너머로 뻗어 온 무화과 잎이 우리보다 더 기분 좋은 듯 웃고 있었다. 다시 올 수 없는 길을 나서는데 아내는 도로까지 나와 손을 계속해서 흔들어 주었다. 

한 번 만나고 다시는 못 만날 일이 세상에 더 많다. 그러나 미력한 나와 두 번씩이나 만난 것도 고맙지만 집에까지 초대해 주었으니 그저 눈물겹게 감사했다. 

이제 다시 혼자다. 꿈에서도 그려보던 카즈베기로 향했다. 2,000미터가 넘는 산굽이를 수없이 돌고 돌아가야만 하는 길이다. 이 도로는 일명 군사도로 또는 밀리터리 로드(Military Road)라고도 한다. 제정러시아가 조지아를 합병하기 위해 길을 만들고 군사용으로 사용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왕복 2차선의 좁은 길이지만 여기 운전자들은 급차선 변경과 앞지르기는 기본이다. 수백 미터의 아찔한 협곡이라도 전혀 개의치 않고 가히 폭력적이고 위험천만한 곡예운전으로 전력 질주한다. 그럼에도 저들에게는 규칙이 있고 질서가 있다. 마주 보고 달려가더라도 모두 알아서 잘 피해 주고 적당히 즐기는 것 같다. 

모두가 과속으로 달리든 말든 구절양장의 산봉우리를 넘으며 느긋하게 가다 보니 정겨운 산야와 강이 그지없이 아름답다. 작년에 보았던 같은 풍경이라 해도 봄과 여름은 또 새로운 절경이 마음을 신나게 한다. 

짜카리아 집에서의 식사.
짜카리아 집에서의 식사.

조지아에서도 통하는 BTS·손흥민

한 시간 이상을 달렸을까. 왼편으로 작은 학교가 보였다. 이곳의 아이들과 학교가 궁금했다. 우리나라의 산골 분교 정도 되는 초등학교였다. 마침 몇몇 친구가 있어 손을 흔들었다. 한국을 아느냐고 물으니 여자애들은 소리 지르며 BTS를 너무너무 좋아한다고 했고, 한 남자친구는 손흥민 축구 선수를 좋아한다며 엄지척을 했다. 마침 BTS 엽서 몇 장을 준비해 갔던 터라 선물로 주니 얼마나 즐거워하던지…. 한국의 위상이 대단함을 새삼 느꼈다. 이름을 물으니 '아나노' '마그닷' '기오르기'라고 했다. 순수하고 맑은 눈빛과 해맑은 웃음이 천진하고 예뻤다. 이야기를 더 나누고 싶었지만 마침 그들이 타고 가야 할 미니버스가 도착하는 바람에 우린 손을 크게 들어 올려 하이파이브로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여행은 늘 새로운 만남이고 그 속에서 찾는 즐거움과 기쁨이 있다. 조지아의 미래가 저 친구들 손에 달렸다고 생각하니 한편으론 감사하고 다행이다 싶었다.     

이곳을 지나는 길에 우리나라의 간이 휴게소처럼 꼭 들리는 곳이 있는데, 1200년에서 1249년 사이에 지어진 가장 오래된 아나누리 성채(Ananuri Fortress Compiex)다. 푸르고 맑은 진발리(Zhinvali) 호수를 배경으로 우뚝 솟은 성에는 슬픈 전설이 있는 곳이다. 아그라비(Aragvi) 강 언덕에서 조용히 성벽을 따라 내려가며 그 이야기를 기억했다.

아나누리 성채.
아나누리 성채.

목숨으로 끝까지 의를 지킨 아나누리의 전설

약 16세기에서 17세기에 이 지역을 통치하던 아그라비 가문과 근처에 있는 산스세 공작 가문과는 원수지간이었다. 1739년 산스세 가문이 아그라비 가문의 사람들을 몰살하고 성을 차지했다. 이후 테무라즈 2세, 농민 반란 등으로 끊임없는 비극을 당한 성이다. 당시 이곳 '누리' 출신의 '아나'라는 여인이 있었는데, 성이 포위되어 공격을 당할 때 비밀 터널을 이용해 성에 피신한 사람들에게 몰래 물과 식량을 제공했다. 그런데 그가 붙잡혔다. 모진 고문을 당하고 죽으면서도 끝까지 비밀을 발설하지 않아 숨은 사람들의 목숨을 구해주었다. 이후 이곳을 '아나누리'라고 부른다고 했다. 슬픈 전설을 품었어도 잔잔한 호수의 물은 더없이 옥빛으로 푸르다. 

'아나'의 죽음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의를 지키는 일은 목숨을 바꾸는 일이지만 의연히 그 몫을 감당했다. 마치 순교자의 예수처럼 말이다. 그러기에 저 벽에 새겨진 십자가가 더욱 돌올한 것이리라. 마치 펜촉으로 그린 세밀화처럼 정교하고 선명하다. 높은 성채가 난공불락의 요새다. 적으로부터 가문을 보호하고 가족을 지키려는 마음, 그 너머에 있는 가장의 듬직함이 호수에 찬연히 윤슬처럼 빛나고 있음을 보았다. 

이서원 시조시인
이서원 시조시인

성을 한 바퀴 돌다. 망루 쪽으로 올라섰다. 저 건너 높은 산봉우리가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은 채 카랑카랑한 기세로 서 있다. 조지아인의 기상인 듯 든든하다. 수많은 외세의 침략에도 무너지고 또 일어서기를 얼마나 했던가. 평화의 소중함을 누구보다 더 잘 아는 이곳 사람들이다. 아낌없이 주어도 늘 남아도는 사랑의 샘이 저들의 DNA인 것처럼, 무언의 웅변을 저 탑 꼭대기에 세워진 십자가를 보며 묵상해 보았다.

사랑은 뒤를 생각하지 않는다. 용서와 나눔, 베풂과 인정에서 오는 것이다. 엄혹한 카즈베기의 찬바람이 사시사철 불어올지라도 결단코 맞서거나 등을 보이지 않는다. 처연히 나목처럼 서서 받아들이는 미덕, 이 은자(隱者)가 바로 조지아인만이 갖고 있는 정신이지 않을까. 북으로 향해야 할 내 발걸음이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다.

저작권자 © 울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