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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다우리 전망대의 기념탑. 작가 제공
구다우리 전망대의 기념탑. 작가 제공

 

가뜩이나 좁은 도로를 달리느라 초긴장의 연속인데 길옆으로 주차된 대형 트럭은 끝이 없다. 모두 러시아로 들어가는 물류 차량이란다. 몇 날을 참고 기다려야 국경선을 넘을지 장담할 수 없기에 운전자들은 여유롭게 풀숲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가도 가도 이어진 차량 행렬이다. 이 모든 차량은 러시아와 무역을 하려고 이웃한 아르메니아, 카자흐스탄, 튀르키예, 타지키스탄 등에서 왔단다.

 곡예 운전을 하느라 몸도 마음도 지쳐갈 즈음이었다. 산 중턱에 이르렀는데 고산으로 펼쳐진 푸르디푸른 초원을 보는 순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뒤로는 눈 덮인 산이 둘렸으며 앞에는 협곡이다. 바로 이곳이 유명한 '구다우리(Gudauri)'다. 겨울에는 스키 천국으로 20여 개의 트랙을 가지고 있는 대형 리조트로 유럽에서 많은 이들이 찾는 명소다. 그러나 시즌이 끝난 지금은 말과 양 소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으며 대자연의 품에서 마음껏 뛰놀고 있다. 

 

이 넓은 초원에 누워 글 쓰고 빵 뜯는 게 소망

 

그냥 지나칠 수 없지. 한 마리 어린 양처럼 초원을 걸어본다. 수천 미터 산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깃발조차 다 뜯어먹었는지 국기가 깃대 끝에 조금 남아있다. 전망대 앞에 섰다. 이곳 2,395m에 세워진 기념비는 게오르기에프스크 조약 200주년 및 러시아와 조지아의 양국 평화와 우정을 다짐하기 위해 1983년에 세워졌다. 탑은 반달 모형의 모자이크 파노라마 형태로 새겨져 있다. 왼쪽은 조지아의 역사와 미래, 오른쪽은 러시아의 역사와 미래가 붉고 푸른 타일을 벽에 이어 붙였는데 두 나라의 중요상징을 묘사한 것이라고 한다. 

 조지아의 에레클레 2세는 이슬람의 강력한 세력에 밀리자 기독교인 자국을 지키기 위해 같은 기독교 국가인 러시아에 손을 내밀었다. 1783년에 바로 위 조약을 체결하며 동맹국을 맺었다. 그런데 애초부터 불평등 우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1800년에 러시아의 차르 파벨 2세가 강제로 조지아를 합병해 버렸다. 하루아침에 나라 잃은 식민지로 전락한 게 우리의 근대사와 비슷하다. 아픔도 슬픔도 역사의 한 부분이라지만 그것을 기념해 세운 조형탑을 바라보는 국민의 마음은 어떨지 모르겠다. 

 이제 즈바리 패스(Jvari Pass)를 넘어야 한다. 길이 험하기로 악명 높은 도로다. 5월이지만 길옆으로 쌓인 눈이 차보다 높다. 터널은 차가 조금만 방심하면 미끄러져 아찔한 낭떠러지로 추락할 기세다. 어린애 걸음처럼 기어가다시피 해서 겨우 산을 넘었다. 코카서스 산맥을 비켜서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대형 풍경화의 품이 두 팔 가득 펼쳐 나를 받아들여 주었다. 거친 숨소리를 내며 테레크강의 물길이 굽이쳐 흐르고 있는 길가에 차를 세웠다. 

 강 건너 조그마한 마을이 마치 동화 속의 그림처럼 평화롭다. 저곳에는 어떤 이들이 살고 있을까. 방금 건너온 산 너머의 마을과는 사뭇 다른 정경으로 나를 끌어들인다. 조심스레 마을 입구로 들어서서 마치 외갓집에 온 듯 타박타박 굽이진 골목길을 걸었다. 스무 가구 남짓 되려나. 골목 끝 십자가 첨탑의 작은 성소가 있어 문을 두드렸으나 아무도 없는지 고요하다. 누구나 와서 무릎 꿇는 기도처 같다. 앞에는 공동묘지다. 돌비석 묘지명에는 제 생의 가장 아름다웠던 시절의 얼굴이 새겨져 있다. 이 깊은 산중에서 역사의 한가운데로 걸어가며 삶의 힘겨운 날을 다 보내고 하늘로 돌아간 그들이다. 돌아보면 최고의 부와 영화를 누렸다고 해서 삶이 행복한 게 아니리라. 얼마나 최선을 다해 살아냈느냐가 삶의 척도라는 듯 젊고 빛난 미소가 그래서 아름다운가 보다.  

 

루누와 카흐가 살고 있는 마을 전경. 작가 제공
루누와 카흐가 살고 있는 마을 전경. 작가 제공

 

낯선 동양인 어눌한 발음에 박장대소하는 모자

 

칠이 바랜 연푸른 대문집을 두드렸다. 기척이 없다. "우카츠라바!" "우카츠라바!(실례합니다)" 급한 볼일이 아닌데도 그걸 핑계로 사람을 만나고 싶었다. 조금 있으니 모자(母子)가 문을 열어 주었다. 낯선 동양인의 방문에 적이 놀란 눈치다. "감마르조바(안녕하세요)" 어눌한 내 인사가 낯설었겠지만, 손짓으로 어서 들어오란다. 서너 명이 둘러앉으면 꽉 찰 조그마한 부엌에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키가 크고 훤칠한 아들은 "카흐", 어머니는 "루누"라며, 조용하고 수줍음이 많은지 입을 가리며 웃는다. 아들은 성격도 밝았고 적극적으로 내게 말을 했다. 나이는 나보다 열 살쯤은 어려 보여, 내가 "형"이라고 일러주자 입속에서 한참이나 공굴리며 돌돌 말아 "혀엉"하고 불렀다. 나는 "까흐" "카흐"라고 하자 박장대소 한다. 아마도 "까"와 "카"의 중간쯤인가 보다. 어눌한 발음이야 서로가 같지만 마음은 벌써 하나가 되었다. 

 어머니는 금방 빵, 치즈, 사과, 커피를 내온다. 이 마을 풍경이 최고라고 엄지를 치켜세우며 "라마지, 라마지(아름답다)" 거듭 말하자 여기 와서 살자며 나의 손을 힘껏 당겼다. 정말 그러고 싶다. 뒷산 저 넓은 초원에서 양을 치고, 저녁엔 별을 보며 숭엄한 자아와 마주하는 일상을 그려 본다. 글을 쓰고 빵을 뜯어 나누는 게 사치라 해도 한 번은 꼭 이루고 싶은 내 마지막 소망임을 어쩌랴.   

 '호접몽(胡蝶夢)' 시를 잠시 생각했다. '호접몽중가만리(胡蝶夢中家萬里) 두견지상월삼경(杜鵑枝上月三更)'이라, '나비가 된 꿈속에 집은 만 리나 멀고, 두견새 우는 나뭇가지에 달은 한밤중일세.' 깊은 의미의 뜻을 떠올리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다만 수만 리 떠나온 나라에서 나비보다 작은 내가 어찌 이 집에 있느냐 싶었다. 번잡한 내 삶의 어떤 것에서도 다 벗어난 채 오로지 지금의 나로만 멈추고 싶었다면 욕심일까. 

루누와 카흐.  작가 제공
루누와 카흐.  작가 제공

 

 너무 많은 것을 가지려 발버둥 치며 살아왔다. 나눔보다 모음에, 사랑보다 이기(利己)에 더 애태웠다. 떠나보면 보이는 것을 왜 그토록 눈먼 일에 매달렸던지. 근원의 물음에 이제 답해야 할 때가 되었다. 인생은 '번갯불이 번쩍하는 찰나'라고 그러지 않았나. 루누의 깊은 눈에 비친 나를 보며 생의 가장 오목한 한순간을 지나고 있었다. 다시 못 만날 이별이라 해도 기꺼이 웃으며 손 흔들 수 있는 이유를 알겠다. 마을을 돌아 나와 건너편 강 언덕에 다시 섰다. 까노비의 마을이 역광에 찬연하다. 

 

나라의 귀중한 유물 보관하던 성스러운 비밀의 방

 

수도 트빌리시에서 카즈베기까지는 175km 거리로 차로 보통 3~4시간 정도 걸리지만, 하루를 달려 드디어 도착했다. 우리나라 면 단위 정도의 소도시지만 지리적 의미는 이 나라의 정신적 고향이라고 불릴 정도다. 제정 러시아 시절 이곳에서 태어난 향토 시인이자 대문호 '알렉산드 카즈베기(1848~1893)'가 자신의 이름을 붙여 카즈베기라 명명했다. 독립 후에는 조지아 정교의 수도사였던 '스테판(Stepan)'과 성스럽다는 뜻의 '츠민다(Tsminda)'를 합성해서 '스테판츠민다'로 바뀌었다. 그런데도 옛 지명에 더 익숙한 듯 아직도 쉽게 그 이름을 버리지 못해 카즈베기로 통용되고 있다. 

 왜 수많은 여행객은 변방인 이곳을 으뜸으로 찾아오는 것일까. 그것은 2,170m 산봉우리에 '게르게티 츠민다 사메바교회(Gergeti Trinity Church)'가 있기 때문이다. 적의 침범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위치로, 14세기에 건립되었다. 전쟁이나 재난 시에는 나라의 귀중한 유물을 이곳으로 옮겨와 천장에 있는 비밀의 방에 보관했다. 그만큼 성스러운 곳이라는 뜻이다. 

 옛 소련 공산당 시절에는 모든 교회의 예배가 금지되었지만, 이곳만큼은 세계적으로 찾는 성지여서 예배를 인정했다고 하니 얼마나 거룩한 곳인지 가늠하겠다. 문학사적으로도 러시아의 천재 시인으로 '러시아 국민 문학의 아버지'라고 일컫는 '푸시킨'이 이곳에서 3년간 시를 썼으며, '톨스토이' 또한 4년간 여기 군대에 자원입대하여 단편 소설인 유명한 '코카서스의 죄수'를 탈고했다고 전한다. 그리고 '막심 고리키'는 페인트공 생활을 하면서 어느 날 코카서스 산맥의 장엄한 광경과 사람들의 낭만에 매료돼 긴 방황의 터널을 벗어나 작가가 되었다고 한다. 그만큼 이곳의 세계문학사적 업적은 우리가 상상 그 이상이라고 해도 될 만큼 소중한 보배라고 생각된다. 

러시아로 향하는 세계 각국의 물류 차량들. 작가 제공
러시아로 향하는 세계 각국의 물류 차량들. 작가 제공

 

 어린 시절 앉은뱅이책상 옆에 좌우명처럼 걸려 있던 작은 액자가 있었다. 거기엔 에델바이스 압화를 배경으로 푸시킨의 시가 적혀져 있어 날마다 외우곤 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슬픈 날엔 참고 견디라 즐거운 날이 오고야 말리라/ 마음은 미래를 바라느니 현재는 한없이 우울한 것/ 모든 것 하염없이 사라지나 지나가 버린 것은 그리움 되리니(하략)'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이서원 시조시인
이서원 시조시인

 깊은 의미는 잘 몰랐지만, 노트에 연필로 꾹꾹 눌러 썼던 위의 시가 지금 새로운 의미로 다가옴은 왜일까. 가난했던 현실을 벗어날 수 없을 것만 같았던 그 시절, 책을 읽고 시를 탐독하는 일은 사치라는 내 어린 자존심에서 온 불안함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시인은 이 작은 마을에 살면서 '모든 것 하염없이 사라지'는 것에 대해 얼마나 사유하며 명상했을까. 그가 품었던 산, 그가 우러렀을 하늘, 생의 전부가 아른거린다. 시를 쓴다는 일은 자신을 버리는 일에서 시작됨을 안다. 산협으로 흐르는 묵음의 언어를 받아적으며 거닐었을 골목길에 내 걸음을 살며시 얹어 포개어 본다. 수천 미터의 산맥에 둘려 문명의 전도는 더딜지라도 그만큼 순정하고, 자신을 함부로 드러내지 않는 거룩한 저 고봉이 문학의 정수리 같아 가슴이 뜨거워진다.  

 별은 한없이 높고 영롱하며 산 정상의 교회 불빛은 마치 이 땅을 끌고 우주로 안내하는 나침반 같다. 우러르면 보인다. 깊고 높은 세상은 우리 영혼의 아름다운 새 안식처라고. 이서원 시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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