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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 장세련.
삽화 장세련.

털보는 처음 낯을 보인 이선달을 하찮게 생각했다. 더구나 재미있게 생각한 것은 곱상하게 생긴 노총각 장꾼이 취급하는 물품이었다. 그것이 남자들이 다루기에는 애매한 규방에서 사용하는 방물이었다.  털보는 이선달의 방물 보따리를 풀게 한 뒤 마구 분탕질을 했다. 머리에 바르는 동백기름을 자신의 머리에 듬뿍 발라보기도 하고 분갑을 열어 고운 분가루를 한주먹 움켜쥐고 부하들의 머리에 뒤집어씌우기도 했다.

"이제 그만 하시게."

털보가 정신없이 분탕질하고 있는데 이선달이 차분한 목소리로 제지했다. 털보는 처음에는 말귀를 얼른 알아듣지 못했다.

"그만 하라니까!"

이선달이 공기가 찢어질 듯 날카로운 고함을 내지르고서야 털보가 움찔하며 동작을 멈추었다. 갑자기 돌멩이로 뒤통수라도 얻어맞은 표정이었다.

"뭐라구? 지금 나더러 한 소린가?"

"그래. 이 미친 산돼지 같은 놈아."

"뭐. 뭐라? 산돼지?"

털보가 바닥에 내려놓았던 작두날을 집어 들었다. 다짜고짜 말도 없이 작두날을 들어 이선달의 머리통을 내려찍었다. 바로 맞으면 두개골이 수박처럼 두 쪽이 날 판이었다. 그러나 이선달의 발놀림은 신기에 가까웠다. 작두날을 피한 상체가 바닥으로 넘어지는가 싶더니 두 손을 바닥에 짚고 가위차기로 털보의 턱주가리를 걷어찼다. 

털보는 그 자리에서 나무토막처럼 뒤로 나가떨어졌다. 이선달이 쫓아가 쓰러진 털보의 목을 발로 밟았다. 한참을 밟고 있으니 털보의 이마에 굵직한 핏줄이 솟아올랐다. 눈알이 왕방울만 하게 튀어나오고 얼굴색이 잘 익은 능금빛이 되었다. 조금만 더 밟고 있으면  숨통이 끊어질 것 같았다.

이선달이 밟고 있던 발을 떼자 털보는 그 자리에 축 늘어져 버렸다. 털보의 졸개들이 찬물을 들고 와 얼굴에 부었다. 그제야 젖은 머리카락을 흔들어대며 바닥에서 일어났다.

"어떠냐. 이 미련한 산돼지 놈아. 정신을 좀 차렸느냐?"

이선달이 다시 털보의 머리통을 걷어차려고 했다. 털보가 다급하게 무릎을 꿇고 이마를 땅에 대었다.

"아이구, 잘못했습니다. 대장님을 몰라보고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허허허. 대장님은 무슨. 장돌뱅이더러 대장님이라니 가소롭구나. 허허허."

그날 이후로 장꾼들은 마구령을 마음대로 넘어 다닐 수 있었다. 그러나 산 사람들도 먹고는 살아야 했으므로 적당량의 통행세를 바쳤다. 전에는 털보가 마음 내키는 대로 빼앗다시피 했었다. 그러던 것이 이선달이 나타나고부터는 일정량의 비율대로 물건을 나누어 주었다. 예를 들어 마른 건삼을 한 짐 지고 가는 사람은 건삼 한 근을 통행세 명목으로 내놓는 식이었다. 내놓는 양이 좀 적다 싶어도 크게 나무라지 않았다. 더러 의견이 맞지 않아 큰 소리가 오가는 경우가 있어도 폭력 사태까지 가지는 않았다.

그러다 보니 산 사람들과 장꾼들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유대감 같은 것이 형성되어갔다. 산 사람들은 장꾼들이 덜어주고 가는 물품도 물품이지만 바깥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편하게 전해 들을 수 있었다. 올해부터 장꾼들에게 전해 듣는 이야기는 주로 자리가 위태롭게 된 어린 상왕의 이야기였다.

"나라가 어찌 되려고 이 모양인고. 왕의 자리가 무엇이라고 어린 조카를 쫓아내고 그 자리에 오른단 말인가."

"그러게 말일세. 금성대군은 또 어떤가. 형제를 귀양 보내다니. 권력이 그렇게 좋단 말인가?"

"영월 땅이 첩첩산중인 건 어떻게 알고 어린상왕을 청령포로 귀양을 보냈담."

"그걸 모른단 말인가? 신숙주란 놈이 영월 군수로 있었으니까 고자질을 한 것이지. 구중궁궐에 묻혀 사는 사람들이 그걸 어떻게 알았겠나."

"에구 그럴 줄 알았으면 신숙주란 놈을 영월 있을 적에 아작 냈어야 했는데."

"아이구 아서라. 군수 나리라면 똥개 새끼처럼 꼬랑지를 말고 쥐구멍을 찾아 들어갔을 위인이 그런 소릴 하면 쓰나."

"형님은 무슨 소리를 그렇게 야무지게 합니까. 내 비록 산적질은 할지언정 내 혈육을 잡아 죽이는 짓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 장하다. 네가 상감마마보다 낫다. 나랏일 하는 놈들이 산적보다 못한 세상이구나."

산사람들도 나랏일 돌아가는 이야기를 듣고는 안타까워 혀를 끌끌 찼다. 산사람들의 입에서 삼강오륜이 무너진 나라라는 소리가 나오자 장꾼 하나가 너털웃음을 웃었다. 산적이 되어 행인들 주머니나 터는 도둑놈 주제에 삼강오륜을 입에 올리는 것이 같잖아 보였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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