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문왕의 맏아들 김정(金晸)이 신라 제49대 헌강왕(憲康王)이 되었다. 헌강왕대에는 자연재해가 없어 해마다 풍년이 들고 기근이 사라지자 백성의 삶도 안정되었다. 서라벌 거리는 초가집은 사라지고 기와집만 가득했고 풍악과 노랫소리가 끊이지 고 밥을 지을때는 장작 대신 숯을 때었다고 전해진다. 김정은 어릴때 부터 영특했으나 왕이 되어 하늘에 내린 풍요에 젖어 가무를 즐겼는데 하루는 포석정(鮑石亭)에서 경주 남산의 신이 나타나 춤을 추자 왕 따라 춤을 추었다. 이 춤을 어무상심(御舞祥審)이나 어무산신(御舞山神)이라고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헌안왕이 두 딸을 남기고 세상을 뜨자 희강왕의 손자이자 왕의 사위인 응렴(膺廉)이 제48대 경문왕(景文王)이 되었다. 조카 문성왕에게 왕위를 물려 받은 헌안왕이 두 공주의 짝을 지어주기 위해 총애하던 국선(國仙) 응렴을 불러 두 딸 중 마음에 드는 딸과 결혼하라 한다. 응렴의 부모는 외모가 예쁜 둘째 딸과 결혼하라 제안하고 응렴의 시선도 둘째 딸에게 향했다. 그러나 스승인 범교사(範敎師)가 둘째 딸과 결혼하면 세가지 손해가 날것이고 맏딸과 결혼하면 세가지 이익이 있을 것이라는 조언하자 응렴은 맏딸 영화부인(寧花夫人) 김씨와 혼인을
제41대 원성왕 증손자인 우징(祐徵)이 해상왕(海上王) 장보고(張保臯)의 힘을 빌려 육촌 형제 민애왕을 죽이고 왕위에 올라 신라 제45대 신무왕(神武王)이 되었다. 제42대 흥덕왕이 숨지자 왕의 사촌 동생인 균정(均貞)과 5촌 조카인 제륭(悌隆)이 왕위를 놓고 다투었는데 제륭이 숙부 균정을 죽이고 희강왕(僖康王)이 된다. 이때 아버지 균정을 왕위에 올리려다 실패한 아들 우징은 배를 타고 달아나 청해진의 궁파(弓巴)에게 몸을 의탁해 숨어 있었다. 장보고란 이름으로 더 친숙한 궁파는 당나라 서주(徐州)에서 용병 장수로 지내다 흥덕왕 때
헌덕왕이 반란을 일으켜 조카 애장왕을 시해하고 반란을 도운 동생이자 태자인 수종(秀宗)에게 왕위를 넘겨 제42대 흥덕왕이 되었다. 헌덕왕때 부터 통일신라는 급격히 쇠락하기 시작했다. 헌덕왕 이후 왕들은 국정에 대한 비전도 없이 권력만 탐하며 나라를 이끌 리더쉽도 부족했다. 헌덕왕이 즉위하고 극심한 흉년이 들더니 백성을 구휼할 능력도 없어 농민 반란이 일어나고 굶주림에 지친 민초들은 신라를 버리고 당나라로 도망 갔으나 붙잡혀 타국 노비 신세로 전락하는 일이 생겨났다. 왕위 패권 다툼에 패해 명주(溟州, 강원도 강릉)로 물러나 있던 무
신라 원성왕의 손자 소성왕(昭聖王)이 죽자 그의 맏아들 13살인 청명(淸明)이 제40대 애장왕(哀莊王)이 된다. 원성왕의 둘째 아들이자 어린 왕의 삼춘인 언승과 동생 수종이 왕을 대신해 섭정을 했다. 왕의 삼춘들이 실권을 휘두르자 민심이 흉흉해지더니 8월 대보름 추석에 때아닌 흰눈이 내려 서라벌이 적막강산을 이루는 기상 이변이 생기고 세상도 어지웠다. 실권자인 숙부 언승이 어느덧 22살 어엿한 청년으로 자란 조카 애장왕에게 청해진(淸海鎭, 전남 완도)에서 어지러운 국정을 잠시 잊고 쉬고 올것을 권유한다. 애장왕은 미모의 여인과 하룻
신라 혜공왕 때 김지정의 반란군을 물리친 상대등 김양상과 이찬 김경신은 혈맹 동지였다. 혜공왕을 죽이고 김양상이 먼저 왕위에 올라 선덕왕(宣德王)이 되고 그가 죽자 김경신도 왕위를 이어 제38대 원성왕(元聖王)이 되었다. 선덕왕을 이을 유력자는 원래 상재(上宰) 김주원(金周元)이었으나 하필 왕위 승계를 논의하는 날 큰비가 내려 알천(閼川, 경주시 북천)의 물이 불어나 김주원이 입궁을 못하게 되자 왕위 계승 2위인 이재(二宰) 김경신이 왕위를 차지하며 무혈 쿠테타에 성공했다. 이보다 앞서 김경신이 천관사 우물속에 뛰어 드는 이상한 꿈
몸은 남자이나 마음은 여자로 태어난 경덕왕의 아들 건운(乾運)이 8살에 왕이 되니 신라 제 36대 혜공왕(惠恭王)이다. 경덕왕이 태자를 얻지 못해 전전긍긍하다 표훈대사로 부터 딸을 얻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은후 아들을 고집하다 하늘의 순리를 거슬리며 아들을 얻었니 몸은 아들이나 마음은 딸이었다. 경덕왕은 문화정책을 표방하며 불교를 중흥하고 신라의 전성기를 열었음에도 집권 말기에 이르러 귀족과 신하들의 다툼이 잦아지고 끝내 반기를 드는 이도 있으니 반역자와 죄수가 늘어 감옥마저 부족했다. 혜공왕이 왕좌에 오르자 태후 만월부인(滿月夫人
성덕왕의 셋째 아들로 태어난 헌영(憲英)은 형인 효성왕이 아들 없이 숨지자 왕좌에 올랐으니 신라 제33대 경덕왕(景德王)이다. 불국사, 석굴암 등을 지으며 신라 불교 문화의 꽃을 피운 경덕왕은 삼모부인(三毛夫人)과 결혼해 아들을 얻지 못하자 왕비를 출궁시키고 만월부인(滿月夫人) 김씨를 새로운 왕비로 맞아 들인다. 하루는 왕이 신하들에게 위의(威儀)가 있는 승려(영복승榮服僧)를 찾아 모셔오라 하니 때마침 경주 남산 삼화령(三花嶺)에서 미륵부처에께 차 공양을 마치고 돌아오던 스님 충담사(忠談師)와 마주하게 된다. 충담스님은 화랑
성덕왕(聖德王)의 두번째 아들 승경(承慶)이 16살에 왕위에 오르니 신라 제34대 효성왕(孝成王)이다. 외조부 김순원(金順元)이 자신의 딸을 효성왕의 왕비(혜명왕후 김씨)로 삼고 권력을 키워 나가자 다른 왕비의 세력과 암투가 생겨 귀족 간의 권력 갈등과 반란으로 확대되었다. 또 지진, 유성 출현, 핏빛으로 물든 강물, 월성(月城)에 나타난 여우의 울음 등 여러 가지 변고에 관한 기록도 남아있다. 즉위 6년만에 효성왕은 숨지고 유언에 따라 화장돼 유골은 동해에 뿌려져 왕릉이 없다. 선대왕인 증조할아버지 문무왕 처럼 죽어서 왕릉을 세우
신라 제33대 성덕왕 때 순정공(純貞公)이 아슬라주(강원도 강릉) 태수로 발령 받아 가던 길이었다. 해변에서 점심을 먹는데 주변 바위산 절벽이 병풍 처럼 둘러진 곳(삼척 남화산)에 예쁜 철쭉 꽃이 피어 있었다. 순정공의 아내 수로부인(水路夫人)이 그꽃에 반해 꽃을 꺾어 오기 바라나 길을 따르던 사람 모두가 험준한 벼랑 기세에 엄두 조차 내지 못한다. 때마침 새끼를 밴 암소를 끌고 가던 한 노인이 그 말을 듣고 꽃을 꺾어 주면서 노래(헌화가獻花歌)를 지어 함께 바쳤는데 이러했다. 【 "자주빛 바윗가에 잡은 손 암소 놓고 / 나를 아니
신문왕의 둘째 아들이자 효소왕의 동생인 신라 제33대 성덕왕(聖德王)은 36년간 통치하며 신라의 전성기를 누렸다. 당시 양귀비에 푹 빠진 당나라 현종(玄宗)은 삼국통일로 악화된 신라와 외교를 개선해 신강국 발해의 영토 확장을 저지해야 했다. 신라도 영유권(패강浿江 이남의 땅)을 인정 받고 당나라의 선진 문물을 받아 들였다. 당나라에 유학생을 보내고 국학(國學)에서 유학(儒學)을 장려해 나라의 틀과 제도를 넓혀 나갔다. 어느날 신라의 왕궁에 추문이 나돌았다. 궁궐에는 두 왕비가 있었는데 낮에는 왕비인 대소왕비(성정왕후 成貞王后)가 있
신라 제32대 효소왕(孝昭王)때 화랑 죽지랑((竹旨郎)은 향가 모죽지랑가(慕竹旨郞歌)의 주인공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죽지랑은 젊은날 화랑 김유신의 맞수였으나 성장해 삼국통일 전선에 부사령관으로 활약하며 김유신 오른팔로 여러 전쟁을 치뤘고 진덕여왕 부터 신문왕까지 4대에 걸쳐 재상을 지내며 왕을 보좌했던 통일 영웅이다. 삼국통일은 신라의 많을 것을 바꾸었다. 진골도 왕위를 승계할수 있게 되자 권력 다툼은 더 치열해졌고 왕족과 귀족들의 암투도 끊이지 않았다. 그러다 신문왕의 장인 김흠돌 난을 계기로 화랑제는 존폐 위기에 처한다. 화랑
문무왕의 맏아들 정명(政明)이 왕위를 이으니 신라 제31대 신문왕(神文王)이다. 재위 기간 12년 중 삼국통일에 힘쓴 공신들은 힘이 커지자 견제하며 왕권 강화에 집중했다. 특히 즉위후 한 달만에 반란을 일으킨 장인 김흠돌(金欽突)을 처형하고 왕비 김씨도 출궁시켜야야만 했다. 외세에 맞서 힘을 합쳤던 귀족들이 삼국통일후 왕실 저항 세력이 되자 고구려.백제.말갈인들을 포용하며 군사력을 장악했다. 신하들에게 직무의 대가로 논.밭을 주던 녹읍(祿邑)을 없애고 재임 기간만 토지의 조세를 받을수 있는 관료전(官僚田)으로 전환했다. 귀족들이 군
무열왕의 태자 법민((法敏)은 일찍 전장터에 뛰어들어 삼국통일을 매듭지으니 신라 제30대 문무왕(文武王)이다. 태자 법민은 백제 사비성을 무너트리고 의자왕의 태자 부여융(扶餘隆)을 땅에 꿇어 앉히고 얼굴에 침을 뱉으며 꾸짖었다. "예전에 너의 아비가 나의 여동생(김고타소)을 억울하게 죽여 옥중에 묻은 적이 있다. 나로 하여금 20년 동안 마음이 아프고 골치를 앓게 했는데 오늘 너의 목숨이 내 손 안에 있구나!" 일갈하자 태자 융은 엎드린채 아무말이 없었다. 백제를 멸한 이듬해 무열왕이 죽자 왕위에 오른 문무왕의 앞날은 험난했다. 당
백제 성왕은 나·제 동맹을 힘입어 한강 하류 옛 수도를 회복했으나 영토를 확장해가던 신라 진흥왕에 다시 빼앗겼다. 성왕은 딸 소비 부여씨(小妃 扶餘氏)를 진흥왕에게 위장 시집을 보내 방심케 한뒤 가야·왜와 연합해 태자 창(昌, 위덕왕 威德王)을 선봉장으로 내세워 신라 관산성(管山城, 충복 옥천)으로 응징에 나섰으나 어이없이 매복해 있던 신라군에 붙잡혀 처형되고 머리는 신라 궁궐 계단에 묻히는 수모까지 당한다. 수많은 날을 절치부심하던 아들 의자왕이 신라 대야성(大耶城, 경남 합천)을 급습해 김춘추 사위이자 성주인 김품석(金品釋)과
신라 무열왕은 목숨을 내건 군사 원조에 나서 어렵게 당나라 태종에게 원군을 받아 철천지 원수 백제를 무너 뜨리려 한다. 부왕인 무왕에 이어 백제 부흥에 앞장 선 의자왕( 義慈王)은 신라의 40여개 넘는 성을 빼앗고는 오만해져 사치와 방탕을 일삼고 왕의 치세가 예전 같지 않더니만 충신의 직언 마저 외면하고 간신들에게 놀아난다. 장창호 작가는 나·당연합군의 침략을 앞둔 의자왕과 신하들의 대화를 극화로 다룬다. 어느날 충신 성충(成忠)이 나·당연합군 공격을 예측하며 뱃길로 기습할 당 수군을 기벌포(伎伐浦, 충남 서천군 장항)에서 막고 육
김춘추(金春秋)는 진지왕의 손자이며 진지왕의 맏아들 용수(龍樹)와 선덕여왕과 자매인 천명부인(天明夫人) 사이에 태어났다. 부인은 김유신의 여동생 문희(文姬)로 문명왕후(文明王后)이다. 춘추는 진덕여왕이 숨지자 상대등 알천(閼川)과 왕위 경쟁 끝에 진골계로 처음 왕좌에 오른 신라 제29대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陵)이다. 할아버지 진지왕이 황음(荒淫)에 빠져 폐위돼 두 아들 용수와 용춘(龍春)은 성골에서 진골로 골품이 떨어지는 '족강(族降)'이라는 수모를 당한다. 이에 왕위 계승 서열 밖으로 밀려나고 진흥왕 큰 아들 동륜(
삼국통일의 주역이자 신라 화랑(花郞)의 표상인 김유신(金庾信). 신라 법흥왕에 투항한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 구해왕(仇衡王, 수로왕의 9세 손)의 증손이자 백제에 맞선 관산성(管山城) 전투에서 이겨 성왕을 처형한 김무력(武力)장군의 손자이다. 부친 서현(舒玄)은 진흥왕 아우 숙흘종(肅訖宗)의 딸인 만명부인((萬明夫人)을 우연히 만나 첫 눈에 반했으나 숙흘종이 두 사람의 만남에 반대해 딸을 가두고 못 만나게 하려 했다. 락이 집에 떨어진 어느날 만명은 달아나 만노군(충청북도 진천) 태수로 발령 받은 서현과 함께 떠났다. 이때 진골계 시
진평왕 동생 국반(國飯) 갈문왕( 진안갈문왕 眞安葛文王)의 딸인 승만(勝曼)공주가 신라 두번째 여왕으로 등극해 제28대 진덕여왕(眞德女王)이 된다. 비담의 난 시기에 죽음을 앞둔 선덕여왕이 사촌 여동생 승만에게 왕위를 넘기라 유언을 남긴 것이다. 여왕 등극에 반발해 군사 반란을 일으킨 재상 비담과 염종은 수세에 몰려 명활산성에서 김춘추와 김유신의 정부군에 격렬히 항거하던 어느날 밤하늘에 살별(혜성, 유성)이 서라벌로 떨어져 정부군은 국운을 걱정하며 사기가 크게 떨어지자 김유신 장군이 불을 붙인 허수아비를 대형 연에 매달아 어둠속으로
진평왕의 딸로 신라 최초 여왕에 오른 제27대 선덕여왕(善德女王). 신라 골품제(骨品制)라는 신분제에 따라 성골계만 왕위를 이어가다 진평왕이 딸만 셋이어서 성골계 덕만(德曼)공주가 왕위에 오르니 삼국통일의 기반을 다진다. 북으로 수나라가 멸하고 들어선 당(唐)나라 태종이 중국 문화 황금기를 이뤘고 고구려는 영류왕(榮留王) 그리고 백제는 무왕(武王)이 나라를 다스리고 있었다. 진평왕은 일찍 후계 구도를 짜기 위해 선왕이자 숙부인 진지왕의 두아들 중 큰아들 용수(龍樹)를 천명공주와 작은아들 용춘(龍春)은 덕만공주와 각각 혼인을 시킨다.